중세 여성신학자들





김 재 현




“오 연약한 인간이여, 잿더미 가운데 잿더미여, 부정한 자 가운데 부정한 자여!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고 받아 적어라. 그러나 네가 말하는데 소심하고, 설명을 붙이는데 단순하고, 글을 기록하는데 배우지 못했으니, 이런 것들을 말하고 받아 적는데 인간의 입으로도 하지 말고, 인간이 고안한 이해로도 하지 말고, 인간적인 글쓰기의 필요에 따라서도 하지 말라. 오직, 하나님의 경이로움 가운데 하늘 높은데 있는 그것들을 보고 들은 대로 말하고 받아 적을 것이니라.”

Scivias, I.1, Hildegard




중세 기독교에서 잊혀진 여성들의 자리 찾기


  20세기 후반 중세 기독교연구는 중세연구의 르네상스라 부를 만큼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전통적 중세연구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주제들이 최근 들어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연구방법론에 있어 기존의 신학 및 철학적 접근을 넘어서 사회학, 인류학, 통계학, 심리학적 접근들이 과감하게 도입되었다. 연구대상에 있어서도 사회적 및 종교적 약자, 이단, 유대인, 여성 같이 기존연구에서 주요 관심권 밖에 있었던 주변적 주제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특히 최근 종교 연구에 있어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적 경향, 개인적 영성과 영적 성숙에 대한 관심의 증가, 여성 중세연구가들의 급증, 여성들과 관련된 일차 문헌들의 발굴과 소개의 지속적 증대는 중세기독교에 있어 여성의 위치에 대한 많은 연구물들을 산출하는 동인이 되었다 (Gies 1978, Thiébaux 1994, Kadel 1995, Bitel 20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여 년의 중세 여성에 대한 연구는 중세기독교에도 남성신학자에 뒤지지 않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데 일차적 강조점이 있었다. 즉, 중세기독교사 전체에 있어 주요 여성들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와 이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 동안 묻혀진 여성들에 대한 발굴, 그리고 주요 원 저작에 대한 편집 및 소개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왕성한 중세 여성에 대한 연구를 고려할 때, 이제는 중세의 거시적인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흐름 위에서, 그리고 중세기독교라는 전체적인 전망가운데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을 자리매김 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안고 있다.

  필자의 글 제목이 함축하듯, 우리는 “중세 여성 신학자들”이라는 말을 어느 정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최근까지 학자들이 “중세의 여성들,“ ”중세의 신비주의 여성들,“ ”중세의 여성작가들“이라는 용어는 많이 사용해 왔지만, ”중세의 여성신학자들“이라는 용어는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G. Evans는 ꡒ중세의 신학자들ꡓ (The Medieval Theologians) 이라는 인물중심의 중세 신학자 개괄서에서 단 한 명의 여성도 독립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Evans 2001). "중세의 신학자"라는 개념규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 시점에서 필자는 광범위한 신학적 담론을 발전시키면서 성경해석과 설교를 비롯한 다양한 신학 작품을 남긴 ꡒ여성신학자들ꡓ이 중세기독교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여성신학자들“이라는 범주가 중세기독교연구에 한 중심 주제로 다루어져야 할 시기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여성들의 신학적 작업을 기존 남성중심의 신학에 대립 각을 세우면서 중세기독교내의 여성으로서 자신들만의 독립된 자의식이나 혹은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과는 다르다. 다만, 필자는 여성 역시 중세 기독교사회의 한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다 균형 잡힌 중세기독교와 중세 신학에 대한 이해는 잊혀진 여성들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신학적 역할 규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여성: 악마에게로 이끄는 통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신부인가?


  시대를 뛰어넘어 교회와 사회에 대한 여성 기독교인들의 간과할 수 없는 공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위치가 종종 무시되어 왔다. 그러한 여성 폄하의 근저에는 아마도 터툴리안 (Tertullian)에서부터 시작되어 중세후기 종교심문관들의 교본으로 사용된 Malleus Maleficarum (1486년 출판됨) 이르기까지 도도히 흘러온 여성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고정관념 -“Women as devil's gateway or the Bride of Christ-이 흐르고 있었다 (Clark 1986, 23-60, Bloch 65-91). 3세기 초반 북아프리카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여성들의 옷차림에 관하여” (On the Dress of Women)라는 논문에서 기독교 여성들이 검소하게 옷을 입을 것을 권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시대에도 살아있습니다. 죄 역시 필연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여성)은 악마에게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당신은 금지된 나무를 열어제친 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처음으로 무시해 버린 사람입니다. 당신은 악마가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아담을 꼬득인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아담을 그렇게 가볍게 부셔 버렸습니다. 당신의 형벌, 즉 죽음 때문에,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살갗을 가릴만한 의복”(tunic of skins)이상의 것으로 당신을 치장하려고 합니까?1)


  터둘리안이 주장했던 것처럼, 여성은 진정 “악마에게로 이끄는 통로”인가 아니면 제롬 (Jerome)이 주장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Bride of Christ)인가? (Clark, 27-29).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기독교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중세 때는 “구덩이 빠진 여성” (women in a pit)인가 아니면 거룩한 “대좌” (pedestal)위에 그리스도를 안고 앉아 있는 여성인가라는 이중적 태도로 전개되었다 (Mewlyn 1989, 121-164, Williams and Echols 1993). 타락의 첫 원인인 이브와 구원을 잉태한 마리아라는 두 여성상에 투영된 중세 기독교인들의 여성 이해의 양면성은, 교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여성에 대한 중세 기독교의 복잡한 여성인식과 그 안의 역설을 웅변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중세 설교가들과 신학자들은 아담을 속이고 사탄을 유혹해 들여온 이브의 속성을 끊임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해 동정녀인 신의 어머니 (Virgo Dei Genitrix)로서 중보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 경배를 강조하면서 급기야는 마리아 숭배라는 컬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한 신학자의 입장 안에서조차 쉽게 분리되어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애매하게 섞여 있다는 점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여성들을 하나님이 남자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물인 동일한 여성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운데 죄가 들어왔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초대 기독교와 비교할 때, 중세시대는 여성들과 관련된 훨씬 많은 역사적 문학적 자료들을 가지고 있지만, 여성들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여성들의 업적과 영향에 대한 평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세 기독교와 사회에서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점은 최근 많은 학자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Paul Rorem은 중세 여성신학자들을 시대를 따라 네 그룹으로 나누어 개략적 소개를 시도했다 (Rorem 2003, 82-93).2) Rorem이 시도한 시대별 구분 뿐 만 아니라, 중세 여성들의 역할에 대한 주제별 구분 역시 우리의 이해를 쉽게 해 줄 수 있다. 이해의 편의상 필자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중세 여성들의 역할을 나누어 보았다. 첫째, 남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의 경우 (5세기의 Clothilda나 Clovis), 둘째 카리스마적 거룩함을 지닌 여인들 (Julian of Norwich나 Margery of Kempe), 셋째, 교회나 수도원에 많은 돈을 기증하면서 기독교에 영향력을 끼친 부유하고 고상한 여성들, 넷째, Hildegard of Bingen 같이 교사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 여성, 다섯째, 복잡한 교회정치에 외교관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금욕주의적 여성들 (Catherine of Siena나 Bridget of Sweden).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개혁가, 신비주의자, 거룩하고 모범적인 어머니, 순교자, 성인들로 등장하여 중세 기독교와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Larrington 1995, Amt 1993).

  이런 의미에서 “중세 여성신학자”라는 범주에 대한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를 제안하면서, 필자는 이 글에서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네 명의 여성들을 그들의 삶과 신학적 요점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문학적 혹은 현실적 요소들과 그들의 다른 여인들에 대한 입장, 혹은 여성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간략하게 고찰해 보겠다.



빙엔의 힐데가르드 (Hildegard of Bingen, 1098-1179)


  수많은 중세 여성 중, 힐데가르드는 중세 여성신학자라는 호칭을 붙이기에 가장 좋은 예이다. 특히 11세기 후반의 그레고리 7세의 개혁운동과 12세기 클레르보의 버나드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힐데가르드는 이 시기 기독교의 개혁과 변화에 신학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그 누구보다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여성이다. 힐데가르드는 그레고리에 의해 본격화된 교회개혁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학적 논지를 구축했고, 동시대 남성성직자들과의 서신교환과 설교를 통해 성직자의 청결과 청빈한 삶을 주장했으며, 당대 가장 큰 이단으로 간주된 카타르(Cathars)에 대항하여 설교여행을 하기도 했다.

  힐데가르드는 1098년 독일 마인츠 근교의 Böckelheim 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몸이 아주 병약했다. 8세 때 숙모 Jutta에게 맡겨졌으며, 이후 그녀는 Disenberg에서 수도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 Jutta의 뒤를 이어 이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으며, 1147년 이후 Rupertsburg (Bingen)과 Eibengen (Rüdesheim)지역에 공동체를 이전 확대시켰다. 그녀의 주된 저서들과 그 속의 상징적 삽화들이 보여주듯, 힐데가르드는 신비적 비젼을 많이 보고 기록했다. 이미 1148년에 그녀의 비젼들은 마인츠의 대주교와 교황 Eugenius에 의해 공인되었다 (Newman 1989, 1-34).

  힐데가르드는 약초에 대한 저술로부터 성경주해, 설교, 묵시문학, 드라마, 시, 묵상집,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Scivias, Liber vitae meritorum, 그리고 Liber divinorum operum이다. P. Dronke가 주장했듯이, 힐데가르드는 여성으로서 중세 이슬람학자였던 아베로이스에 견줄 만큼 많은 독서편력과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다 (Dronke 1984, 144). 그녀의 편지들은 많은 경우 남성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12세기 판 Dear Abbey의 역할을 했다. 그녀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심오했으며, 성서주석분야와 관련해 교부들에 대한 독서도 많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과학 및 철학적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역시 위에서 언급한 힐데가르드의 저술들을 통해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당대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힐데가르드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남성들에 대하여 힐데가르드는 우선 애매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잘 알려진 대로 수녀원장과 행정가, 그리고 설교가로서 많은 남성 독자들을 지녔다. 그레고리 7세의 개혁운동에 열정적 지지자로 힐데가르드는 남성 성직자들을 상대로 상담을 했고, 설교 여행을 했으며, 남성성직자들과 많은 서신 및 의사 교환을 했다. 그녀는  Volmar 라는 남성 성직자를 개인 비서 겸 필경사로 두었으며, 독신과 금욕의 회복을 통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비록 클레르보의 버나드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몇 편의 설교를 썼고, 당대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카타르에 대항하여 최소한 네 번이 넘는 설교여행을 노구를 이끌고 여성의 몸으로 진행했다. 자신의 수녀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부 남성 성직자들과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힐데가르드는 여성의 권리나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투쟁을 벌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힐데가르드가 수없이 많은 중요한 작품을 남기고 자신의 저작에서 여성적 이미지와 수사를 능숙하게 사용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힐데가르드를 페미니스트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있어서 힐데가르드는 상대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때로는 남성과 여성사이의 상호존중을 위해 논쟁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남성, 특히 남성 성직자들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우월적 위치를 비교적 쉽게 인정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녀가 속해있던 전통적인 베네딕트 수도원 전승이라는 구도에서 힐데가르드의 삶과 신학을 이해 할 필요가 있다.

  힐데가르드의 여성일반에 대한 이해는 어떠했을까? 흥미롭게도 힐데가르드의 독서와 지적 배경에는 역사적 혹은 동시대의 다른 여성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한 예로 힐데가르드는 자신의 유명한 동시대인이자 아벨라르의 연인이었던 엘로이즈 (Heloise)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요 작품 중의 하나인 Scivias의 서문에는 자신이 42살 된 나약한 여성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가를 잘 기록하고 있다 (Scivias, I.1). 이는 힐데가르드가 여성으로서 얼마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것을 단순히 남성-여성이라는 대립적 도식으로 이해하는데는 쉽게 동의 할 수 없다. 오히려 힐데가르드가 즐겨 사용한 신학적이고 상징적 레토릭으로 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신학자로서 힐데가르드의 공헌은 여성적 이미지를 이용한 그녀의 신학과 성경주해에서 가장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특별히 그녀의 대표적인 저작인 Scivias와 절기별 주기를 따른 57편의 설교 (Incipiunt Expositiones)는 힐데가르드 자신의 독특한 라틴 단어 사용, 레토릭, 여성적 특징 (feminine physicality), 그리고 다양한 언어적 묘사기법을 통해 힐데가르드의 능숙한 여성적 이미지 활용을 잘 보여준다. Scivias를 포함한 3대 주요저작에 삽입된 수많은 삽화들은 신학의 중심주제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어떻게 재 해석 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특별히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독법에 기초한 상징론은 힐데가르드가 우주 (대우주)와 인간 (소우주)을 상징과 해석을 사용하여 얼마나 심오하게 이해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녀가 남긴 다양한 상징적 그림들은 힐데가르드의 인간이해, 여성이해, 그리고 기독교 신학 안에서의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의 깊은 경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는 힐데가르드식의 묵상과 명상법의 중요 구성요소로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을 이끌게 된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 여성신학자로서 힐데가르드를 이해하려 할 경우, 그녀의 성경주해와 성경적 주제를 가진 글 쓰기와 삽화들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Jaehyun 2001, 133-151)


스웨덴의 브리지트 (Bridget of Sweden, 1303-1373)


  힐데가르드가 여성신학자로서 신학적 깊이를 잘 드러내어 주었다면, 스웨덴의 브리지트는 부유한 귀족출신으로 당대 가장 첨예한 교회사적 사건인 교황의 아비뇽 유수 (1309-1377)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이의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여성이다. 브리지트는 동시에 이러한 정치적 주제를 자신의 신비주의적 저술과 연결시킴으로 중재자 겸 신비주의자로서의 여성신학자의 활약을 잘 보여주고 있다 (Obrist 1984, 227-234). 

  브리지트 수도원 (Brigittine monastic order)의 창시자인 브리지트는 스웨덴의 수호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브리지트는 1303년 첫 번째 스웨덴 왕조가 나온 비르거 (Birger Persson)와 잉게보그 (Ingeborg) 사이에서 부유한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와 같은 가족 배경은 이후 그녀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 잉게보그가 타고있던 배가 난파되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꿈을 꾸게 되었는데, 장차 태어날 그녀의 딸이 앞으로 성인이 될 것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바다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Brigitta of Sweden, 72). 이러한 출생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브리지트의 삶은 일생동안 신비적 경험과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7살 때 브리지트는 첫 번째 받은 계시에서 브리지트가 자신의 침대 넘어 재단 위에 하얀 옷을 입고 앉아있는 한 여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 여인이 브리지트에게 다가와 브리지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얹어주었다 (Brigitta of Sweden, 73).

  브리지트는 13살에 Ulf Gudmarsson과 결혼했고 이어 8명의 자녀를 낳았다. 1336년부터 그녀는 사촌인 스웨덴 왕 Magnus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나, 1341년 남편과 함께 스페인으로 순례 길을 떠났다. 왕 Magnus가 죽은 이후, 브리지트는 보다 잦은 계시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계시는 이후 그녀의 이중 수도원 (Double monastery)의 규칙의 근간이 되었다. 브리지트의 주요 저작으로는 전 7권의 Revelationes, 여덟 번 째 저작인 Liber celestis imperatoris ad reges, 아홉 번 째 이자 마지막 작품인 Extravagantes이 있다. 이중 여덟 번 째 책은 당대의 정치적인 투쟁을 주로 담았고, 마지막 책은 그녀의 수도공동체인 Vadstena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중세 여성신학자로서의 브리지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정치적 역할이다. 브리지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정치적 긴장과 갈등의 이유로 1309년 이후 아비뇽에 머물고 있던 교황들에게 로마로 돌아갈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녀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를 들어 이 시기 교황이었던 Clement XI, Urban V, Gregory XI에게 아비뇽을 떠나 로마로 돌아갈 것을 교훈 했다. 브리지트의 주된 저서인 Revelationes는 정치 종교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담고 있었다. 브리지트는 스웨덴 왕족 출신으로 교황과 황제간, 그리고 로마와 프랑스간의 타협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장차 100년 전쟁으로 이끌고 갔던 프랑스와 영국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아비뇽거주 교황들의 로마복귀에 대한 브리지트의 노력은 결코 왕족출신으로서의 그녀의 소일거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교황의 아비뇽 유수가 “영적인 의무에 있어 교회의 완전한 실패“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Obrist, 231). 즉, 교황의 아비뇽거처가 결과적으로 당대의 고리대금업자의 역할에 지나지 않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정치세력인 프로렌스 사이에 갈등과 위협만 일으킨다고 질책했다. 이와 같은 브리지트의 노력들을 스웨덴왕정과 로마교황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볼 수도 있지만, 브리지트가 지속적으로 교회개혁과 교권과 왕권사이의 뿌리 박힌 갈등과 긴장을 여성의 몸으로 기독교의 계시에 근거해 해소하려 했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브리지트의 여성신학자로서의 두 번째 중요성은 그녀의 신비주의적 색채와 약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사회참여 때문이다. D. Sölle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개인들의 절박한 신비적 경험은 때로는 기존 구조들에 대한 선지자적 예언과 개혁에 대한 요구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데, 브리지트는 이에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Sölle 2001, 1-6, 191-207). 그녀는 마지막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돌보며 보냈다. 이는 아비뇽근처에서 활동하던 귀족 출신의 브리지트에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더해 준다. 그녀의 로마에서의 순례 길, 로마에서의 빈자에 대한 적극적인 구호활동은 1348년 로마를 휩쓴 흑사병과 1349년 로마의 지진 같은 당대의 상황이 그녀의 신학이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복음에 기초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청빈한 삶에 대한 브리지트의 강조는 Joachim de fiore의 영향이 깊이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점에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브리지트는 당대의 이러한 종교적 정치적 현실을 신비적인 계시로 받아들여 자신의 저술을 통해 신학적으로 해석해 내었고, 자신의 스스로의 삶을 통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는 점이다. 브리지트의 계시의 핵심주제는 죄악된 인간과 거기에 대하여 “항상 화나신 하나님” (Ever-angry God) 개념이다 (Obrist, 233). 인간의 죄성과 화난 하나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성인과 예언자 같은 특별한 중보자가 없이는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가 없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 이해에서 출발하여, 중보자인 마리아가 브리지트를 당대의 중재자로 선택했고 브리지트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이르게 하는 통로라고 믿었던 것이다. 신비주의적 경험과 계시를 토대로 한 브리지트의 중보자적 자기 이해가 그녀의 삶에 깊이 반영되어 있었고, 브리지트 자신이 그러한 신학적 신념에 따라 일생을 살았다. 동시에 이러한 중보자 개념 하에서 브리지트는 중세 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정결 (purgatory)과 죄의 사면 (indulgence)개념을 자신의 신학과 계시이해의 중심요소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죄악 된 삶, 정결, 그리고 사면개념을 설명하는데 있어 브리지트는 몸 (body)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는 점도 중요하다. 몸의 모든 가능한 부분들의 왜곡과 질병은 영혼의 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데, 몸을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죄의 면죄를 위한 각종 봉헌을 통해서만 그러한 몸의 왜곡을 완화시키거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Obrist, 234, Revelations 6.102).

  1370년 Urban V로부터 자신의 수도원에 대한 공식 승인을 받게 되었다. 다음해 다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70살 노구를 이끌고 성지순례를 떠났으나, 얼마 후 1373년에 로마에서 생을 마감했다. 1391년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당대 여성으로서 상상 할 수 없었던 브리지트의 이와 같은 행동은 때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이 때문에 브리지트는 종종 마녀(Sorceress)로 몰리기도 했다. 그 이유는 “그녀가 로마사람들을 치료함으로 스스로 명성을 얻었고, 그녀의 계시를 통해 로마에 대항하여 가장 참혹한 위협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Wilson 1984, 231). 



노리위치의 줄리안 (Julian of Norwich, 1343-1413)


  폭넓은 신학적 식견과 신비주의적 영성을 가진 중세 여성신학자들의 예는 중세 영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르위치의 줄리안과 마져리 켐프 등이 좋은 예다. 지속된 역병, 궁핍한 삶, 결과적으로 죽음이 만연된 14세기 후반 그리스도의 모성애적 측면과 자비를 강조하면서 줄리안은 영국사회에 등장했다. 줄리안은 특히 영성에 관한 글을 남겼고, 그녀의 주 저작인 Showings 빼어난 수사학적 기교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1394년까지 영국의 성 줄리안의 교회에서 수녀(anchoress)로 지냈다. 그녀는 이미 영적인 상담가로 상당한 명성을 떨쳤으며, 마져리 캠프 (Margery Kempe)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Revelations of Divine Love, 192-3). 줄리안은 1373년경부터 일련의 계시를 받아 15편으로 구성된 Showings로 기록했다. Showings는 짧은 본문 (Short Text)과 긴 본문 (Long Text)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짧은 본문은 긴 본문보다 앞서 기록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계시자체와 이에 대한 그녀의 묵상에 근거하여 줄리안은 삶에 대한 신비주의적 신학적인 비젼을 정교화 시켰다 (Petroff 1986, 299-307, Jantzen 1988, 3-50).

  줄리안의 독서와 저작은 그녀의 영성에 대한 강조를 충분히 설명해준다 (Jantzen, 53-86). 그녀는 Latin Vulagte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구기독교의 수도원의 명상 전통의 진수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그녀의 명상기도에 대한 이해는 그레고리 1세와 클레르보의 버나드와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점에서 우리는 줄리안의 명상전통을 베네딕트 수도원의 명상전통과 연결시킬 수 있다. Showings는 또한 줄리안이 스콜라주의 신학의 형이상학에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상흔(wounds)에 대한 이해는 그녀의 경건성에 있어 프란시스의 영향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줄리안의 신학적 명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한 복판에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난 (Passion)이 자리잡고 있다 (Jantzen, 89-107). 고난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줄리안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구했다: 첫째, 그리스도의 수난을 직접 보는 것, 둘째, 신체적인 질병을 앓는 것, 셋째, 세 곳에 상흔 (three wounds)을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줄리안의 기도에 따라 그녀에게 육체적 질병을 주었을 때, 이와 동시에 일련의 비젼이 내려왔고, 이러한 비젼들을 통해 그녀는 고난 당한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이점에서 줄리안이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을 자신의 비젼 가운데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을 고백한다. 줄리안은 저작에서 창조와 구속, 그리고 택함 받은 이들에 대한 예정론이 그녀 신학의 중심을 이룬다. 그녀는 하나님을 인간들이 상처를 받도록 허락하지만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궁극적인 상처를 받도록 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적 모성애에 비유하면서 당대의 사회적 절망감을 신앙에 근거해서 치유하려 했다. 그래서 그녀는 삼위일체를 그리스도를 모성애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으로 규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C. Bynum의 Jesus as Mother가 보다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줄리안과 같이 신적인 사랑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낸 여성신학자들의 비전 속에서였다고도 볼 수 있다.

  힐데가르드나 브리지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줄리안의 신비주의적 상징과 신학은 당대의 사회상황을 종교적으로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줄리안은 중세 가장 참혹한 자연재앙이었던 역병이 최고조에 이를 때 태어났고, 이어지는 불완전한 사회상을 자신의 인생과 문학작품을 통해 현실감 있게 반영해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가공할만한 역병과 사회적 피폐함 속에서 종교적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줄리안은 바로 그리스도의 종 되심과 아들 되심이란 메타포 속에서 당대 사람들을 자신의 비젼 가운데 섬기고자 했고, 하나님의 아들 됨이라는 위로를 그들에게 제시해 주고자 했다 (Showing 8, Long Text chapters 16-21). 줄리안이 신비적으로 경험한 세 가지 상흔은 바로 “종”과 “아들”이 가진 신학적 의미를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줄리안에게서 그리스도는 힘든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할 “종”이였고, 이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줄 유일한 “아들”이었다.

  다른 여성들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줄리안은 힐데가르드와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 즉, 줄리안은 Showings에서 다른 여성들에 대한 언급을 별로 하지 않는다. 마리아에 대한 언급을 하기는 하지만, 마리아는 줄리안의 명상문학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대신, 줄리안이 당대의 교회상황에서 자신이 상당히 외롭게 느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스스로를 자신은 교사가 아니고, ꡒ다만 무지하고, 약하고, 연약한ꡓ 여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이는 힐데가르드에서 처럼 여성들의 문학작품에 흔히 나타나는 문학적 메타포로 이해해야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무지에 대한 강조야말로 신학적 담론을 지배하던 남성들의 비난이나 경계의 눈초리를 피해 천국으로 가는 패스포트를 담보해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Williams and Echols, 133-142).

  줄리안의 신학과 비슷한 예를 우리는 줄리안이 한때 상담을 해 주었던, 마져리 켐프 (Margery Kempe, 1373-1439)에게서도 볼 수 있다. 줄리안보다 한 세대 늦게 등장한 마져리는 신비주의적 순례자로 그녀의 자서전적 작품인 The Book of Margery Kempe를 통해 순례문학과 금욕주의적 명상을 결합한 독특한 문학양식을 배출했다. 눈물과 슬픔, 성령의 강력한 역사라는 중심 주제는 그녀의 엄격한 금욕주의적 묵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Petroff, 229). 마져리는 종종 남성 성직자들과 언쟁을 벌이기는 하지만, 시종 신비적 명상이 주류를 이루는 그녀의 작품은 중세 신비주의에 큰 영향을 미친 The Cloud of Unknowing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문학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자기인식이라는 점에서도, 마져리의 여성이해는 줄리안과 유사점이 많다. 마져리 역시 줄리안처럼 다른 여자들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순례자의 이미지를 통해 개인의 깊은 내면적 신비주의적 묵상을 구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피잔의 크리스틴(Christine de Pizan, 1363-1429)


지금까지 논한 세명의 여성신학자들이 비교적 강한 신학적 자기의식이 있었다면, 마지막 예로 논할 피잔의 크리스틴은 중세 사회에 여성으로서 자기 의식이 가장 뛰어난 경우이다. 오늘날 학자들의 기준에 의해서도 크리스틴은 중세시대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남성지배 사회로부터의 여성의 독립성과 자기의식, 그리고 여성의 권리를 위해 문학을 매개로 해 일생동안 투쟁했다.3)

  크리스틴은 1363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유명한 의사 겸 점성술학자인 아버지 Thomas Pezano (Tomasso di Benvenuti da Pizzano)에게서 태어났다. 크리스틴이 5살 때 아버지가 프랑스의 Charles 5세의 궁정 점성술가로 임명되어 프랑스에 오게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아버지의 관심 아래 크리스틴은 상대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남성들에게만 개방되었던 라틴어, 문학, 신화, 철학, 역사, 성서학, 과학들을 공부했다. 이와 같은 폭넓은 작품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녀의 문학적 활동의 근간이 된 기본 교육을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틴은 성인 전, 성서, 주해서, 성경적 주제를 다룬 다른 글들, 그리스와 로마 고전과 신화집 들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자신의 이후 저작들은 크리스틴이 중세의 여느 여성작가들에 비해 폭넓은 독서를 했으며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들을 보다 깊이 읽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15세 때 궁정비서 Ettiene du Castel와 결혼했으나, 얼마 후 아버지와 남편을 차례로 잃게 되었다. 세 자녀를 데리고 과부가 된 자신의 심정을 크리스틴은 I am a Widow Dressed in Black 라는 시에서 자신의 절망과 상실감을 잘 그려내고 있다 (Willard 1993, 352-362).

  크리스틴의 문학활동의 동기는 그녀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점이다. 크리스틴에게 있어 문학은 파괴적인 심리적 재정적 압박감, 그리고 아버지와 남편 사별 이후 이어지는 고소사건들의 와중에서 유일한 위로요 탈출구였다. 자신의 어머니, 세 자녀, 조카, 그리고 본인을 위한 생계수단으로 문학을 이용했다는 자체가 기존 중세 여성들의 문학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녀는 순수하게 종교적 혹은 문학적 이유만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크리스틴은 생존이라는 실존적 이유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요즘말로 ꡒ직업을 가진 싱글 엄마ꡓ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작가로서 크리스틴은 자신의 일생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책을 만들고 생산해 내는데 많은 비용이 들었던 시기에, 크리스틴 자신의 사본들이 아름답게 새겨진 본문들, 값비싼 양피지, 놀랄 만큼 정교한 삽화들로 치장되어 후대에 남겨졌다는 사실이 그녀의 문학가로서 성공을 잘 보여준다. 크리스틴은 살아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다시 편집하고 출판한 아주 드문 중세 여성 작가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을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로 가지고 있었다. 1418년 55세의 나이에 Poissy 수녀원으로 은퇴했으며, 쟌다르크에게 헌정한 시 한 편을 남기고 1430년 생을 마감했다.

  크리스틴은 시와 산문을 포함하여 편지, 서술문, 논문집, 그리고 많은 묵상집을 남겼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작품인 The Miracle of Joan of Arc (1429)에서 크리스틴은 자신의 관심분야인 정치적, 페미니즘적, 그리고 종교적 신념들을 61행에 걸친 쟌다르크에 대한 헌정시를 통해 잘 드러내 주었다 (Willard, 352-362). 당대의 다양한 문학 기법들을 잘 아우르면서도 자신의 시대에 풍미한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성적인 주제들을 예리한 시각으로 논의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현대적 의미에서 크리스틴을 중세 수많은 여성 중 가장 페미니스트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etroff는 크리스틴이 세운 “City of Ladies"를 설명하면서 중세기독교사회에서 크리스틴의 독특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해 주었다.


크리스틴은 여성들이 교육면에서 얼마나 불이익을 당해왔는가,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경제적이고 법률적 제도내의 기능들을 배워나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그녀는 또한 기존의 문학전통이 어떻게 여성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미워하도록 만드는 여성 이미지를 창조해 왔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제도적 전통의 억압에 맞설 힘을 기르기 위해 여성들이 스스로의 전통을 만들고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틴은 자신이 (여기) 수집한 문학과 같은 것들을 중세 여성들이 왜 썼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이론과 분석을 제공해 주었다. 피잔의 크리스틴은 자신 이전에 작품을 남긴 이들의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경험들에 관해 말했던 것이다. 바로 그들을 위해 크리스틴은 City of Ladies를 세웠던 것이다 (Petroff 1986, 52).


  중세 교회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Petroff가 지적한 대로 크리스틴은 여성의 위상을 옹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는 점이다. 그녀는 여성을 파괴적이고 업신여기던 당대의 입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많은 면에서 여성의 평등권을 주장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Lesser Treatise on the Romance of the Rose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에 잘 나타나 있다. Lesser Treatise on the Romance of the Rose은 원래 중세 사회 큰 영향을 미친 The Romance of the Rose라는 책에 대한 반박성 작품으로, 크리스틴 자신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형성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The Romance of the Rose는 Right,ꡓꡒRectitude,ꡓꡒJusticeꡓ라는 은유적 세 인물을 내세워, 인류역사를 통해 여성들이 발달이 얼마나 느렸고 남성들에게 종속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책으로 당대  프랑스인의 남성우월적 사고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크리스틴은 J. Gerson 의 도움을 받아 이 글에서 The Romance of the Rose는 여성에 대한 편견, 비 도덕성, 그리고 멸시로 가득 차 있다고 비난했다. 동시에 그녀는 그 책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왜곡시켰는지 날카롭게 비판했다.

  The Book of the City of Ladies는 이브 이후 수많은 여성들의 업적을 문화와 역사적 구분에 따라 나누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당대에 이르는 여성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신화적인 도시 이미지를 그려내었다. 이 책은 크리스틴의 여성에 대한 생각을 보다 냉정하게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당시 프랑스로 막 번역된 보카치오(Boccacio)의 De Claris Mulieribus라는 책에 기초한 것으로, 크리스틴은 이를 통해 역사가운데 보다 잘 교육받고 지적인 여성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거스틴의 The City of God을 연상시키는 크리스턴의 도시는 여성들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지 못한 사회에 대항하여 잠재력있는 여성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이 신화적 도시에 사는 여성들을 통해 역사를 통해 여성들은 지성, 여성다운 독특한 특징과 공헌들을 보여왔다는 점을 크리스틴은 문학적 기교가운데 보여주었다. 전문적인 문필가로 크리스틴은 엄청난 양의 역사적인 지식과 자기 시대의 깊은 정치적 사회적 주제에 대한 통찰력을 가미했다. 책임 있는 정부와 정치윤리의 중요성, 여성들의 권리, 여성들의 부정할 수 없는 업적들, 그리고 종교적 헌신 등에 대한 강조들이 크리스틴의 저작에 깊이 배어있다.

  특별히 이 책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 하다. 보카치오는 원래 자신의 책에서 역사를 통해 볼 때 지적이고 교육받은 여성들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크리스틴은 보카치오의 그러한 이해의 기준은 대개 교회 내에서 성인으로 공인된 여성들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평했다. 물론 이 시대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성인으로 공인 받는다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둘째, 크리스틴은 자신의 연구지평을 넓혀서, 고대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교회의 역사, 그리고 자신의 동시대 세속역사까지 포함하여 많은 여성 모델들을 발굴해 내었다. 그녀는 크산티페 (Xantiphe)나 페네로프 (Peneloppe)같은 고전적 여성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다, 에스더, 마리아와 같은 성경에서의 여성들, 캐더린 (Catherine of Alexandria)이나 클로비스 왕의 아내와 같은 모델들을 기독교역사에서 찾았다. 보카치오의 여성이해를 강력히 비평하면서, 크리스틴은 기독교 안팎에 지적이고 잘 교육받은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일련의 문학작품들을 통해 잘 보여주었다. 심지어 그녀는 보카치오와 사용한 극소수의 상징적 인물이 아닌, 쟌다르크와 같은 동시대인에서 진정한 의미의 ꡒThe Three Virtuesꡓ의 모델을 찾았던 것이다.



“중세 여성신학자들ꡓ이란 개론서를 기대하며


  이 글에서 필자는 중세 여성신학자들이란 주제로 남성신학자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고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일반 남성 신학자들보다 훨씬 더 왕성하게 활동한 중세 여성들의 신학과 활동을 알아보았다. 힐데가르드는 남성 성직자들을 가르친 중세에 보기 드문 여성 중의 하나였고, 브리지트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은 암울한 아비뇽 유수 기간에 돋보였다. 줄리안의 신비주의적 명상은 프란시스의 명상과 비견할 만 하고, 크리스틴의 작품은 당대 최고의 작가인 보카치오의 작품에 대항해 이루어졌다. 피잔의 크리스틴의 경우, 여성 신학자라기보다는 중세 탁월한 여성 논객이요 작가로 규정하는 것이 정당하겠지만, 크리스틴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신학적 담론을 지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중세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필자는 크리스틴을 이 글에 포함시켰다.

  중세 여성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중세 기독교내의 다양한 종교적 운동이나 흐름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이들은 기존의 종교적, 교회적 전통들을 가능한 존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과 문학적 활동을 통해 개인적으로 강한 열정, 확신, 그리고 신념을 표출했다. 필자가 논한 네 사람 모두 자신이 처한 종교적 사회적 현실에 그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뛰어 들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중세 여성신학자들의 삶은 하나님과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신비주의적 묵상과 독백, 그리고 대화와 같은 문학적 기교를 통해 자아의 변화와 성숙 과정을 뚜렷하게 그려주고 있다 (Petroff, 22).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독특한 여성적 이미지를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지금껏 단편적이고 개별적 인물중심으로 진행되어온 중세 여성신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포괄적으로 그리고 중세기독교라는 넓은 지평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중세 여성신학자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역할을 연구하는데 있어,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중세 여성들을 연구하는데 있어, 현대 학계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들 여성들의 작품과 활동들을 단순히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보거나, 역사적, 여성사적,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과도하게 접근하려는 태도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방법론적 접근이나 학제간 연구는 중세 여성기독교인들의 위치와 역할을 보다 설득력 있게 자리매김 해 주겠지만, 이러한 연구는 동시에 이들의 삶과 사상의 주요 토대가 되었던 중세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학적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중세 여성 신학자들은 우선적으로 자신들이 처해있던 세계에 대하여 신과 인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와 믿음을 가지고 종교적인 반응을 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사색과 담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 단지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즐겨 사용한 여성적 그리고 언어적 메타포를 단순히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이해하는 것은 중세 여성신학자들의 신학적 담론이 지닌 의미의 다층성과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 동안 잊혀지거나 무시되어온 중세의 수많은 여걸과 여장부와 여성영웅들에 대하여 이제는ꡒ중세여성신학자들ꡓ이라는 범부로 포괄적 개론서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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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edieval Women Theologians


Jaehyun Kim


This article purports to develop the term and category of "medieval women theologians" by presenting several examples from the twelfth to fifteenth centuries. In spite of immense studies on medieval women in the last three decades, the primary goal in this area of studies, especially in theological and religious settings, seems to have been to point out that there were many women leaders and writers in medieval Christianity. Further studies of their theological location and importance in overall medieval Christendom, contribution to medieval theology, and the relationship to their contemporary male theologians, are yet to come.

Anticipating further substantial studies of this issue, I propose four outstanding cases: Hildegard of Bingen (1098-1179), Bridget of Sweden (1303-1373), Julian of Norwich (1343-1413), and Christine de Pizan (1363-1429). Hildegard taught and preached to male clergy, Bridget's political and social activity during the Avignon captivity was so conspicuous, Julian's mystical meditation could be well compared to that of Francis of Assisi, and one of the central pieces of Christine's literature was written against Boccacio's De Claris Mulieribus. Briefly revisiting central theological themes, I also look at their literary background, the motif of writings, their understanding of other females and males, and their self-understanding of themselves as women.




Key Words: 중세, 여성 신학자, 힐데가르트, 브리지트, 줄리안, 크리스틴.


1) Tertullian, On the Dress of Women, I, 1.1-2.


2) 로렘의 네가지 구분은 다음과 같다. 그레고리 1세 이후 초기 중세의 Dark Ages,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고중세 시기 (Heloise, Hildegard와 Clare of Assisi), 13-14세기의 Mechthild of Magdeburg와 Community of Helefta, 중세 후기와 종교개혁기 (Active Women in the late Middle Ages and Reform).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발행되는 Theology Today는 최근 중세 여성신학자들에 대한 특집으로 힐데가르드와 노르위치의 줄리안 등을 포함한 몇몇 여성들을 심도깊게 다루고 있다. Theology Today, vol. 60/1 (2003).


3) Petroff는 Medieval Women's Visionary Literature라는 책에서 크리스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크리스틴은 프랑스 최초의 전문 작가가 되었으며, 자신의 작품을 여성들의 위상을 변호하기 위해 사용했다. 그녀의 삶의 경험과 교육의 넓이는 14세기 여성치고는 아주 특출한 경우였다. 그녀와 견줄 수 있는 상대는 자신의 당대가 아니라 지난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흐로츠비트 (Hrotsvit), 빙엔의 힐데가르데, 엘로이즈 정도였다.” Petroff, 304. 이미 1920년대부터 학자들은 크리스틴을 현대 페미니즘의 선구자로 보기 시작했다. Lula McDowell Richardson, The Forerunner of Feminism in French Literature of the Renaissance from Christine de Pisan to Marie de Gournay (Baltimore, 1929),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