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적 상상력과 역사적 텍스트:

��신곡��, ��진주��, ��공작 부인 이야기��를 중심으로*1)




강 지 수





��신곡��(The Divine Comedy), ��진주��(Pearl), ��공작 부인 이야기��(The Book of the Duchess)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거기서 비롯된 상실감과 그리움에 대한 것이다. 저작 시기가 모두 14세기라는 사실 외에도 종교적, 문학적으로 유사한 점이 발견되기에 이 세 작품은 개별 작품론에서 종종 비교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이 세 작품이 죽음, 이별, 상실의 주제를 공유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또 다른 공통의 특성을 계시문학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신곡��과 ��진주��는 오래 전부터 계시문학의 전통에서 연구되었고 두 작품 모두 성서의 계시록은 물론 중세 신학의 종말론과 계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더 나아가 ��진주��의 계시적 상상력이 ��신곡��을 강하게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종종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개별 작품을 연구하면서 다른 작품들과 유사한 측면에 대하여 언급하는 논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 본격적으로 이 세 작품의 계시적 상상력을 서로 비교하는 연구는 많지 않다. 계시문학의 정의는 다양하게 제시되었으나 일반적으로 특정 문학 작품이 성서의 계시록을 전용하면서 세상과 교회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천년왕국에 대한 비밀스러운 예언을 담고 있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크게는 천국에 대한 정당한 기대를 묘사하는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역사의 종말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성서의 요한계시록이 성서의 종결을 장식하는 문헌으로서 중세 문학에 전용되는 측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 동안 계시문학에 관한 연구는 주로 성서의 계시록과 관련된 인유에 대한 세밀한 추적과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해독하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 계시록의 전용이 형식이나 서사의 결과로 나타나는 측면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런 문학적 측면을 고려하기 위해 계시문학의 내재적 긴장, 즉 엄연히 역사성을 가진 텍스트가 역사성을 초월하는 계시를 재현해내야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요한 계시록을 비롯한 성서적 전통을 전범으로 하여 특별한 은총을 받은 시인이 우주적 질서와 의미에 대한 환상을 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처럼 서술하는 데서부터 계시와 텍스트를 철저히 분리하고 문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유물임을 천명하는데 이르기까지 중세 계시문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신곡��이나 ��진주��, 그리고 ��공작 부인 이야기��는 모두 계시의 이러한 텍스트적 정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작품들의 흥미로운 쟁점들이 상당 부분 시인이 계시의 텍스트성에서 유발된 문제를 다루는 과정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국��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를 신의 활동 영역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제한된 관점에서 신의 방식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30권, 2장). 또 다른 저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를 신이 쓴 시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난해하여 오로지 신만이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백록�� 11권 31장). 따라서 역사의 세계 ― 신학적으로는 타락한 세상 ― 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계속 신에게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으나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신의 해답은 물론 시간의 종점에서야 주어지는 계시를 통하여 드러난다고 한다. 종말은 완전한 계시와 절대적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 이후의 모든 사건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 시점에 와서야 인간은 신의 의도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계시의 시대는 역사의 종말과 함께 온다는 것이 정통적인 중세 기독교 사관이다. 따라서 역사의 종말이 와야만 검은 옷의 기사가 왜 그렇게도 뼈저린 상실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지, 그리고 진주가 왜 그토록 잔인하게 화자에게서 떠나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역사의 종말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미래의 사건이며 또한 시간의 한 순간, 그리고 현재의 역사적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좀더 단순화시키자면, 종말이란 역사 읽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역사를 이해하려면 역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벗어나야 이해할 수 있는 계시가 시간 속의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남다른 특권을 부여받았음을 자처하는 것이다.

흔히 지적되듯이 계시는 신만이 아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종말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일종의 모순어법이라 할 수 있다. 계시문학은 인간의 질서와 위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다. 종말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종말이 되어야 주어지는 계시가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인간의 언어로 신의 뜻을 재현한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의 종말과 이 종말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다. 계시의 저자가 이런 한계에 당면하게 되면 당연히 언어적 재현의 한계에도 당면하게 된다. 기표와 기의가 “사촌/기만 관계”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서시」 742)이고 진실과 텍스트성의 관계가 절대적으로 신성시되는 경우부터 철저한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까지 다양하고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는 중세에 오면 계시와 역사성, 그리고 텍스트 사이의 관계 역시 복잡 다양하게 이해되고 표출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구원사의 텍스트는 영원한 신의 관점에서는 완성되었고 해석도 끝났지만 시간속의 인간의 관점에서는 종말이 와야만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총체적이고 절대적인 해석과 결론으로서의 심판이 가능해진다.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연결되어 있고 성서의 마지막 문서가 계시록이라는 것은 이러한 구도에서 중세 문학의 종결의 페러다임이 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중세 문학 작품을 계시문학으로 연구하는 것은 문학 비평이기도 하면서 문학 이론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계시임을 표방하는 텍스트의 저자는 자신의 저작의 진실성을 인정받으려면 신적인 존재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공표해야 하고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총과 능력을 은연중에라도 내세워서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며 때로는 상당한 위험을 부담하면서 현실 세계가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비난과 경고를 해야 한다. 이런 경우 시인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장치는 계시를 글로 옮기라는 신적 존재의 명령이다. 예언적 사명에 의하여 글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배경 설명은 저자의 입지를 넓히는 방편이 된다. ��신곡��의 경우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사악하게 사는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돌아가면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라고 하고 (「연옥」 32:103) 단테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이 지시를 기록한다. 그의 여행은 신적인 존재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정당화되었다. 단테가 주장하는 권위는 성서의 계시록의 저자와 맘먹는 것이었다. 거기에 비해 14세기 후반 영국의 두 작가가 기록하는 “계시”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 ��공작 부인 이야기��의 화자는, 모든 독자가 와이트의 죽음을 눈치 챈 다음에도 결국 기사가 그녀가 세상을 떠났노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야만 상황을 알게될 정도로 무딘 사람이라 우주나 종말의 신비를 파악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진주��의 화자는 지속적으로 진주 소녀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고 천상의 도시의 환상이 주어졌을 때도 결국은 무모하게 육신을 입은 상태로 가보겠다고 두 세상의 경계를 이루는 강물로 뛰어들다 자기의 진주를 포함한 모든 환상을 잃고 마는 인물이다. 이 두 작품에 나타나는 계시적 상상력은, 계시와 역사적 텍스트 사이의 거리와 긴장만을 부각시킨다.

종말은 오지 않고, 지속되는 시간 속의 사건들의 해석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거울을 보듯이” 분명히 아는 것은 종말 때까지 보류되어 있다는 정통적인 사관은 그런 역사 속의 존재에게 불확정성의 긴장, 불안을 상당히 초래했음을 중세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12세기에 대두된 요아힘 (Joachim of Fiore)의 역사 구분과 종말에 대한 예언은 결국 이단으로 몰리기는 했지만, 완성되었다고 하는 역사 속에서 존재하나 절대적 해석과 종말을 누릴 수 없는 인간이 완성의 이중성에서 벗어나 역사 안에서 계시적 확정성을 추구해보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을 역사 속으로 끌고 들어오려 한 반(反)아우구시티누스적인 그의 의도나 그 외에도 성사(聖史)와 속사(俗史)를 통일시켜 보려는 12세기 신학자나 역사가들의 다양한 시도는 완성의 이중성이라는 부담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Chenu 175-214, Emmerson and Herzman 1-5). 예언자요 성자로 존경을 받던 요아힘은 시토 교단의 수도사로 이탈리아 칼라브리엔에 피오레 수도원을 세우고 카톨릭 교회의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요아힘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시작된 두 번째 시대는 1260년경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구원사의 과거와 미래의 연속성을 주장하면서 구원사로서의 세계사를 삼위일체의 도식에 따라 크게 성부, 성자, 성령이 통치하는 세 개의 시대로 나누는데 새로은 시대의 도래는 점진적인 계시의 증가와 병행한다. 성부의 시대는 일곱 시대로 구성되는데, 여섯 시대는 각 여섯 세대로 구성되며 그리스도는 일곱번째 시대를 형성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성되는 옛 계약의 일곱 번째 시대와 함께 새 계약의 시대 곧 성자의 시대가 시작되는데, 새 계약의 시대도 일곱 개의 작은 시대들로 구성되며, 이 일곱 개의 작은 시대들은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의 연수였던 약 30년으로 구성된 각 일곱 개의 세대들 (총 210년)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세계사는 새 계약의 시대까지 1260년이 걸린다. 그 다음에 다시 일곱의 작은 시대로 구성되는 성령의 시대가 시작한다. 성부의 시대의 특징이 “율법”과 “두려움”과 “종의 신분”에 있다면, 성자의 시대의 특징은 “은혜”와 “믿음”과 “자유인의 상태”에 있으며, 성령의 시대의 특징은 “더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친구의 상태”에 있다.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거치면서, 세계사는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성서, 즉 문자에서 영의 시대로 발전한다. 마지막 성령의 시대에 이르면, 교회는 제도적 기구와 성직자 제도를 갖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통한 직접적 계시가 가능하므로 성서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교회의 임무가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직자의 교회”에서 “요한의 교회”, “영적 교회”로 변할 것이다. 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성직자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것이며 산상설교를 완전하게 실천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속의 부를 버리고, 철저히 가난한 교회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전쟁이 있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분열,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의 적대관계가 극복될 것이다. 요아힘은 그 자신이 새 계약의 40번째 세대에 살며, 이 모든 것이 바로 지금 곧 1260년에 임박하였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가 세운 수도원들을 이 새로운 시대의 선구자라고 생각하였다. 요아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가 도달해야 할 구체적이며 물질적 현실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역사의 궁극적 완성은 역사 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리하여 요아힘의 종말론은 “종말론의 내면화, 영성화, 피안화를 거부하고 종말론의 차안적, 물질적, 현실적 차원을 드러낸다” (김균진 56). 성령을 통한 직접적이고 충만한 계시의 가능성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사관에서 철저하게 지켜졌던 그리스도의 중심적 위치를 흔들었다. 또한 요아힘의 추종자들은 성령의 시대의 특징을 내세워 교회의 권한 축소를 예언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이 그들이 이단시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단테가 요아힘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나 ��신곡��에는 종말을 역사 속으로 가지고 왔다고 할 수 있는 요아힘의 예언적 사관과 같은 측면이 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자처하는 권위는 전통적으로 성서의 계시문학 저자들이 자처하는 권위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대담함을 보여준다 (Papka 236- 237). 단테는 일시적으로라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상태(rapture)였던 사도바울(고린도 전서 12:1-4)과는 달리 육신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육신과 분리된 영혼들의 세상을 여행하게 되며 그러면서도 이 특권이 신이 부여한 것이고 정당화해 준 것임을 천명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그의 책에 “신의 심판”이 서술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 들어온 순례자 단테는 월계, 수성계, 금성계, 태양계, 화성계, 목성계, 토성계, 부동의 항성계, 제9천(Primum Mobile)을 거쳐 최고천에 진입하게 된다. 여기서 베아트리체는 선포하기를


우리는 가장 큰 천구 밖으로 나와 순수한 빛인 천국에 왔습니다. 이 빛은 진정한 선으로 이루어진 사랑으로 가득 찬 지()이며 기쁨으로 가득 찬 사랑이며 달콤함을 초월하는 행복입니다. 그대는 여기서 천국의 제1, 제2의 군대를 볼 것이며 최후의 심판에서의 모습을 한 자를 볼 것입니다 (「천국」 30:40-42)


새로운 환상을 보기 위한 준비 단계로 단테는 엄청난 빛의 일격을 받아 잠시 시력을 잃는다. 그가 시각의 세례를 통해 정화되고 강화된 시력으로 맨 처음 보는 것은 두 개의 둑 사이를 흐르는 빛의 강이다. 단테는 자신의 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베아트리체가 시키는 대로 빛의 강물을 마시자 이전에 꽃과 불꽃으로 보이던 것이 각각 축복받은 사람들과 천사로 눈에 들어온다. 단테가 보는 천국의 성인들은 빛이나 영원한 불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고, 영화롭게 된 몸에 흰 옷을 입고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단테가 종말 때의 성자들의 모습을 본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통적인 교리에 배치되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성자들의 좌석(천상의 장미)이 아직 몇 개 비어있기 때문에 이것은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종말의 모습이라 해야 한다. 이것은 성자들의 모습이 남녀노소라는 육신의 특수성을 띄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가장 완벽하게 영원과 초월에 근접한 순간에 시간성을 명확히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단테는 ��신곡��의 종결 부분에서 영원과 시간, 계시와 역사성의 결합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33곡에서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반복하는 “내가 보기를”을 상기시키는 vidi가 드물게 자체적인 압운을 이루며 4번 반복되는 것은 분명 단테가 천상의 환상을 보는 계시록의 저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단테가 제시하는 종말적 환상 덕분에 ��신곡��은 지복직관(beatific vision)으로 정점에 도달하는 종교시의 철저한 목적론을 완벽하게 구조적으로 재현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제33곡에 이르면 성 버나드는 마리아에게 순례자 단테의 눈에서 장애물을 제거하여 마지막 복, 모든 소망의 궁극, 즉 신의 지존한 모습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순례자에게 위를 바라보라고 하나 그는 이미 위를 응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시선은 무한한 신의 힘과 만나게 된다. 그의 마음속에는 진리의 빛이 번득이게 되고 이제 궁극적 현현이 그에게 허용되었으므로 자신의 욕망과 의지는 신의 사랑과 일체가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신과의 대면은 종말의 대표적인 징표이며 인간인 시인에게 이러한 환상이 주어졌고 그가 이후에 그것에 대하여 글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시인 자신에게 엄청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여행의, 그리고 ��신곡��의 마지막 순간에 화자가 충만해진 그의 시력으로 본 것은 “우주에 낱장으로 흩어져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랑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있는 것”이었다(33, 86-88). 이 책 이미지가 요한계시록 20:12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나오는 “또 다른 책”은 요한계시록 5:1에 나오는 “안팎으로” 쓰여진 봉해진 책을 지칭하는 것이며 이것은 시편 69:28에 나오는 생명책과 동일한 것으로 중세에 이해되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시편 구절에 나오는 생명책이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선택된 자들이 있는 가운데 열려져 절대적 해석인 심판이 내려지는 것이다.2) 더 나아가 이 책은 성 셰르의 휴(Hugh of St. Cher)에 의하면 신의 임재를 의미한다 (Gellrich, 160). 「천국편」 33곡의 책이 신의 임재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다른 모든 하위 상징성을 압도하고 가히 단테가 경험하는 모든 은총의 총체적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했을 때 보게 되는 이 책은 사랑에 의해 한 권으로 묶어져 있고 (legato) 실체(substance)와 우유(accident)가 결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결합과 통일, 완성의 환상은 시의 일부가 아니라 시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시가 완성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처음, 중간, 끝으로 이어지는 순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어 나갈 때는 각각의 면이 낱장으로 존재하지만 다 읽고 나면 이 낱장들은 모두 초월되어 독자의 마음에는 시 한편, 책 한 권의 상태로 남는 것과 마찬가지다. 낱장들이 다 모아져 완전히 묶인 한 권의 책,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써 넣을 것도 없고 새로운 해석도 없는 완결의 상태(closure)의 완벽한 이미지로 신곡의 마지막 곡을 장식한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어떻게?” “왜?”라는 질문에 대한 신의 해답은 시간의 종점에서 주어지는 계시를 통하여 드러난다고 한다면 종말은 완전한 계시와 절대적 해석 그리고 그리스도 강림 이후의 모든 사건이 완성되는 시점이요 사건이므로 이것을 작품 안에서 문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시인은 가히 종말론적으로나 인식론적인 특권을 행사한다고 할 수 있다. 계시의 순간이 작품의 종결 부분과 일치한다면 이것은 구속의 역사와 성서를 그대로 반영한 셈이 된다. 단테는 ��신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계시를 텍스트 안으로 끌고 들어와 당당하게 신의 관점을 제시했다. 「천국편」 제33곡에 대한 페트라이데스(Patrides)의 설명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것은] 모든 시간 속의 사건이 제아무리 임의적이고 비극적으로 보이더라도 그것은 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 연결되어 있는 역사의 황금 사슬의 중요한 고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단테가] 영원의 현재적 관점에서 만물의 “보편적 양식”을 조망할 때 이 진리가 번개의 섬광처럼 그에게 다가온다. (39)


이러한 단테의 계시적 상상력은 14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쓰여진 ��공작 부인 이야기��나��진주��와 다분히 구별된다. ��공작 부인 이야기��의 검은 옷의 기사가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천국에 “직접” 간 단테는 이전의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의 베아트리체를 그곳에서 보면서 절대적인 위안을 받지만 기사가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언어를 통해 기억 속의 여인을 재창조해 내는 것뿐이다. ��공작 부인 이야기��의 화자가 처음 기사를 보았을 때 그는 슬픔에 의한 고통과 절망감으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거의 죽게 된 상태였다. 자기에게 사연을 이야기하면 위로가 되지 않겠느냐는 화자의 제안에 기사는 오비드, 데덜러스, 히포크라테스 갈렌은 물론 죽음조차도 자기를 치유할 수 없기에 화자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기대를 걸 수 없다고 말한다(560-590). 교활한 운명의 여신과의 숙명적인 체스 게임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616-674) 자기의 상황은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연민과 관심에 힘입어 기사는 신세 한탄과 운명의 여신에 대한 질책을 중단하고 자신의 연인에 대한 기억과 그녀의 신체적, 도덕적 덕목에 대한 찬사로 옮겨간다. 우선 자신이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젊은 혈기에 생각과 행동이 일정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그녀의 미모에 대한 회상이 이어진다. 912-913행에서 보듯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술회하는 동안 그녀의 모습은 기사의 상상 속에 재창조되고, 자연이 설정한 미의 모형이라고 기사가 묘사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아무리 깜깜한 어둠 속에서라도/ 나는 그녀를 계속 보는 것 같다” (...for be hyt never so derk/ Me thynketh I se hir ever moo). 기사의 마음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진정 이 세상 그 무엇을 위해서라도 나의 마음에서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을 것”(...by my trouthe, y nold noght/ For al thys world out of my thoght/ leve my lady)이라고 한다(1109-1111). 그녀는 기사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단테가 천국에서 베아트리체를 놓고 “내 마음을 천국처럼 만들어 주시는 여인 (quella che ‘mparadisa la mia mente; 천국편 28, 3)”이라고 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상태이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기사에게 와이트의 천국같이 아름다운 모습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은 죽음을 자청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와이트는 이 시에서 기사의 말을 통하여 부활한다. 기사의 언어를 통하여 부활한 와이트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완전한 아름다움과 덕을 갖추고 있다. 전형적인 궁정식 사랑의 수사이긴 하지만 와이트가 ”아라비아의 불사조 (fenix of Arabye)와 같다는 묘사는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켜 그녀가 영광스러운 신적인 존재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는, 지금 이 인간의 세상에서는 와이트의 부활과 같은 기적은 어디까지나 초월적인 세상에서나 있을 수 있는 사건이고, 그녀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이자 실제의 상실이며 그 영향은 기사에게 실질적인 고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화자에게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기사가 “지금?” 이라는 한 마디를 던지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결국은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고 대답을 하는 대목은 이제까지 기사가 화자에게 그녀에 대하여 회상하며 진술한 것이 순간순간 기사가 상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치유나 위안이 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화자의 마지막 진술대로 그녀의 죽음은 “슬픈 일”(routhe)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사냥이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고동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 시의 계시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왕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 근처의 어느 곳으로 갔다.

그곳은 성 요한에게 맹세컨대

흰색 벽의 긴 성으로

숲이 울창한 언덕 위에 있다.

내가 꿈꾸기로는.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내가 말하는 대로 이런 꿈을 꾸고 있었을 때,

성 안에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이 12시를 알렸다.

그 소리에 나는 깼고

내 침대에 누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me thoghte that this kyng

Gan homwarde for to ryde

Unto a place, was there besyde,

Which was from us but a lyte--

A long castel with walles white,

Be seynt Johan, on a ryche hil,

As me mette; but thus hyt fil.

Ryght thus me mette, as I yow telle,

That in the castell ther was a belle,

As hyt hadde smyten houres twelve.

Therwyth I awook myselve

And fond me lyinge in my bed.

                      (1314-1325)


이 결말 부분은 분명 계시적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언덕 위의 흰색 성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진주로 된 현관을 연상시킨다는 논의가 있었다(Huppe and Robertson 91-92). 물론 성 요한이 이 구절에서 언급된다는 것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렇게 보면 이 구절은 슬픔에 차 있는 기사의 집과 그의 위안의 근원을 이 세상에서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재배치시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곳은 더 이상 눈물도 죽음도 없는 곳이며 (계시록 21:4) 그 곳은 열두 천사, 열두 문, 열두 기초석,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는 곳으로 열둘이라는 숫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계시록 21:10-14). 그러나 동시에 기사가 집이라고 돌아가는 이곳은 랭케스터(Lancaster)의 블랑쉬(Blanche)와 리치몬드(Richmond)의 백작인 존 오브 곤트(John of Gaunt)를 연상시키는 현세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는 계시적 위안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러한 위안의 가능성이 역사적으로(만) 재현되고 있다. 화자 또한 역사적 공간으로 돌아오게 되어있고 1331행에서 보듯이 ��공작 부인 이야기��라는 역사적 텍스트가 쓰여지기 위해서는 “시간의 과정” (process of tyme)에 종속되어야함을 천명하고 있다 (Rambuss, 678-679).

그렇다면 ��진주��의 화자가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보는 부분을 살펴보자. 그의 일차적인 반응은 숭고한 경외감과 환희다. 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새 예루살렘은 태양이나 달보다 더 순순하고 눈부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눈부시게 솟아오르는 건축물과 그 중심을 보았을 때 화자는 그 고귀한 환상에 놀라 “매추라기처럼 어리벙벙”(as dased quayl)해 진다. 황홀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닌(nawper reste ne trauayle), 육체의 감각이 없어져서 몸과 영혼이 분리된(rauyste) 상태였다고 한다. 이 대목을 보면 화자가 자신의 경험이 진정 계시록의 요한과 같이 신비한 경험이며 육신을 입고있는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 것 같다. 즉 지상과 천상의 거리를 감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감히 확실히 말하건대

육신을 입은 자가 그런 선물을 경험했다면

모든 학자들이 돌보았다 하더라도

그의 목숨은 달 아래에서 없어졌을 것이다.


For I dar say wyth conciens sure,

Hade bodyly burne abiden pat bone,

Þa3 alle clerke3 hym hade in cure,

His lyf were loste an-vnder mone.

             (1085-1088)


그러나 양이 이끄는 천상의 처녀들의 행진을 보고 난 후 그의 감정은 달라진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천상의 도시의 건축물 뿐 아니라 영원과 인간의 동정심이 결합되는 신비다. 그는 피 흘리는 양을 보며 참담함을 느낀다. “나는 생각하기를 누가 저런 사악한 일을 범했는가?”(1138). 그러다 그는 100,000명의 처녀들을 보며 기뻐한다. 그러다 그 무리에서 자신의 “어린 여왕” (lyttel quene)를 발견하자 그는 그리움(luf-longing)에 압도되어 강물로 뛰어들게 된다. 양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닌 진주와 결합하기 위한 시도이다. 단테가 천국편 2:7-9에서 “내가 건너는 이 물은 사람이 건넌 바 없는 물이다”라고 천명하며 자신의 계시적 상상력에 권위를 부여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진주의 화자에게는 강을 건너려는 시도가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 두 작품의 첨예한 대조를 실감나게 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화자의 위안은 결국 진주와 결합해야만 온전해질 수 있는데 그것은 텍스트를 초월해야 하고 시간을 초월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그러한 위안은 역사의 종점에서만 제공될 수 있으며 계시록적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는 상실과 죽음이 반복적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단테와 달리 ��진주�� 시인은 계시적 종말에 대한 기대를 예표론적으로 제시는 하지만 궁극적인 의도는 계시적 텍스트와 자신의 역사적 텍스트와의 대조를 강조하고 있다.3) ��공작 부인 이야기��와 더불어��진주��에서도 인간의 문학이 신의 완성된 의도를 재현할 수 있다는 단테의 자신감은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에게 역사는 여전히 열려져 있고 화자가 꿈에서 깨어나 계속 시간 속에서의 삶을 영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이 작품의 종교적 가르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진주의 상실과 더불어 이제는 더없이 큰 위안과 기쁨을 주었던 환상의 상실까지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시간의 속박을 받는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큰 고통 속에서 일어났다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한숨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천상의 왕의 뜻대로 될지어다.”


I raxled and fel in gret affray,

And syking, to myself I sayde

"Now al be to Þat Pryncez paye."

            (1174-76)

 

영적이고 계시적인 세계를 역사적인 텍스트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단테와는 달리 ��진주�� 시인과 초서는 철저하게 시간의 속박을 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계시에 대하여 쓰고 있으며 계시적 상상력과 역사적 텍스트의 간극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작 부인 이야기��나 ��진주��와 같은 중세 드림-비전형의 몽시는 시인의 현재성, 텍스트의 역사성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화자가 꿈속에서 어떤 환상을 보았건 그것은 과거의 경험으로서 현재 쓰여진 시의 “역사적” 소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당연히 신곡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곡��과 여기서 다루는 중기영어 작품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작품의 종결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곡��은 위에서 보았듯이 계시의 정점에서 끝난다. 후자처럼 화자를 “거친” 자극을 통해 현실로 회귀시키며 자신의 역사성에 대한 돌연한 각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 영적인 영역에 대한 소망은 확실하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미래에 다가올 일에 대한 소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고 그 때까지의 긴장은 엄정한 현실이다. 이렇게 볼 때 본 논문에서 다루지는 않으나 또다른 14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계시문학으로 꼽히는 ��농부 피어스��(Piers Plowman)에 대한 다음 논평은 ��공작 부인 이야기��와 ��진주��에도 유효하다.


��농부 피어스��의 영적 절정이 작품의 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놀라울 이유가 없다. 비록 아무리 신의 뜻이 승리하리라는 희망이 역사적 경험의 어둠에 싸여서 불완전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신의 역사가 승리로 끝나리라는 데 대한 랭글런드의 확신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아직 신의 역사는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을 영원한 실재의 정점으로 나타낸 단테와는 달리 랭글런드의 환상은 역사적 실재의 심연을 천착하는 통찰력으로 나타나며 이것만이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감지하게 해주고 직면한 무의미를 인내하게 해준다. (Schmidt, 139)

(인하대학교)




주요어: 단테, 초서, 신곡, 공작부인 이야기, 진주, 계시.







참 고 문 헌


- 1차 자료

Augustine, Saint. De Civitate Dei. Trans. Marcus Dods. The City of God by Saint Augustine. New York: The Modern Library, 1950.

________. Confessiones. Trans. F. J. Sheed. The Confessions of St. Augustine. New York: Sheed and Ward, 1943.

Chaucer, Geoffrey. The Riverside Chaucer. Ed. Larry Benson. Boston: Houghton Mifflin Company, 1987.

Dante, Alighieri. La divina commedia. Trans. with commentary, Charles S. Singleton. The Divine Comedy. Princeton: Princeton UP, 1975.  

The Poems of the Pearl Manuscript: Pearl, Cleaness, Patience,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Ed. Malcolm Andrew and Ronald Waldron. Berk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8.


- 2차 자료

강지수. 「줄과 동전: ��진주��의 포도원 비유와 시간의 문제」. ��문학의 생명력��. 안선재 편. 한울, 2002.

김균진. ��종말론��. 민음사, 1999.


Bynum, Caroline Walker et al. Last Things: Death and the Apocalypse in the Middle Ages. Philadelphia: University of Philadelphia Press, 2000.

Chenu, M.D. Nature, Man and Society in the Twelfth Century: Essays on New Theological Perspectives in the Latin West. Trans. Jerome Taylor and Lester Litl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8.

Emmerson, Richard et al. The Apocalyptic Imagination in Medieval Literature.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2.

Gellrich, Jesse M. The Idea of the Book in the Middle Ages: Language Theory, Mythology and Fiction.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Huppe Bernard and D. W. Robertson. Fruyt and Chaf: Studies in Chaucer's Allegori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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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ka, Claudia. "The Limits of Apocalypse: Eschatology, Epistemology, and Textuality in the Commedia and Piers Plowman." In Bynum et al.

Rambuss, Richard. "'Process of tyme': History, Consolation, and Apocalypse in the Book of the Duchess." Exemplaria 2 (1990): 659-683.

Schmidt, A.V.C. "'Lele Words and Bele Paroles': Some Aspects of Langland's Word-Play." Review of English Studies 34 (1983): 137-150.

ABSTRACT


Apocalyptic Imagination and Historical Text: A Study of The Divine Comedy, the Book of the Duchess and Pearl


Ji-Soo Kang


  While many scholars have studied the works of the 14th century in the context of their apocalyptic views, the kind of apocalypse described in Dante's Divina Commedia, Chaucer's Book of the Duchess and the Gawain-poet's Pearl may also be viewed as formal models of ending of literary texts. It is more appropriate to regard the pilgrim's encounter with God in the Paradiso or the final episodes of the dreamers/ narrators in the English works as the staging of an apocalyptic moment. Among the three works discussed, there is also a radical difference among their views of apocalypse as a way of understanding history and temporality. The pilgrim in The Divine Comedy sees God within the poem, within history. This is an apocalypse that is brought into history. The Book of the Duchess and Pearl are about death, loss, and mourning which are direct consequences of the historical and temporal nature of humanity. The apocalyptic imagination in these works looks forward to ultimate consolation and resolution but these historical texts, nonetheless, turn the narrators and the readers back into history where death and loss still painfully remain.




Key words: Dante, Chaucer, The Divine Comedy, The Book of Duchess, Pearl, Apocalypse



1)* 본 연구는 1999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KRF-99-041-A00242)


2) 이 구절에서 복수로 처리된 책들과 단수로 처리된 책의 의미에 대해서는 Gellrich, 159-161 참조.


3) ��진주��의 종결에 대한 심층적 논의와 이 작품이 철저하게 그리스도중심적인 아우구시티누스의 사관에 입각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졸고 「줄과 동전: ��진주��의 포도원 비유와 시간의 문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