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와 시인: 「기사이야기」의 테세우스와 화자




정 인 주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기사이야기」(The Knight's Tale)를 순전한 로망스(romance)로 간주한다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사랑의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는 팔라몬(Palamon)과 아르시트(Arcite), 그리고 에밀리(Emilye)라고 해야 마땅하겠으나, 막상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로망스에서 전형적인 방해인물(blocking figure)이라 할 수 있는 테세우스(Theseus)이다. 진실하고 완벽한 기사로서 테세우스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뿐만 아니라 작품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물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화자인 기사(knight)를 닮았다. 테세우스를 통해서 화자인 기사는 바람직한 기사의 모습과 이상적인 중세 귀족의 사고 양식을 제시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진실하고 완벽하게 고귀한 기사”(a verray, parfit gentil knyght) (GP 72)1)인 화자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진실한 기사로 제시하고 있는 테세우스에게 자아를 투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기사이야기」에서 테세우스는 무질서하고 우연한 사건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조정자(controller)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화자인 기사는 자신의 작품에 창작과 예술적 질서를 부여하는 또 다른 조정자, 즉 시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기사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와 그것을 듣고 있는 청중의 태도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문학의 가치로 여겨져 왔던 “교훈과 흥미” (of best sentence and moost solaas) (GP 798)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화자와 테세우스, 두 기사가 모두 자신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니엘 켐튼(Daniel Kempton)은 테세우스가 이상적인 기사도를 대변한다고 규정하면서 기사의 책무는 “혼란스런 이방을 정복하여 세상에 질서를 세우는 것” (241)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과연 통치자이며 기사인 테세우스는 통솔과 질서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혼란과 무질서를 배척하는 것을 임무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는 모든 일을 순리에 맞게 처리하려고 노력하며 감성과 이성을 고루 겸비한 통치자로서 그가 내리는 판단과 결정은 최소한 그의 입장에서 보면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선한 결정이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차별적으로 닥쳐오는 우연, 운명, 또는 신의 섭리는 번번이 그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그가 최선을 다하여 판단하는 모든 결정은 또 다른 혼란과 충돌을 만들어내며, 그가 사건에 간섭하면 할수록 사건은 그의 의도와는 멀어져 간다. 결국 그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부질없으며, 절대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그 동안 작품 안에서 질서의 부여자로서 그가 해 온 역할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사건의 통제자로서 테세우스의 실패는 또한 화자로서 기사의 실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화자가 이상적인 기사로 제시한 테세우스가 결국 질서부여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야기를 그렇게 매듭지을 수밖에 없었던 화자도 역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이상적인 통치자로서 테세우스의 실패와 이상적인 이야기꾼, 즉 시인으로서 기사의 실패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작가인 초서가 「기사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어떠한 것인가? 본 논문은 작품에서 두 기사의 역할과 행동을 조명하고 그들의 실패를 분석함으로써 작품의 의미에 접근해보고 그러한 의미와 작가의 의도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려는 시도이다.

  물론 철학적 로망스, 또는 서사적 로망스 등의 꾸밈말이 첨부되기는 하지만, 「기사이야기」가 로망스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로망스의 세 축을 이루고 있는 팔라몬과 아르시트, 그리고 에밀리는 테세우스와 비교할 때 지극히 평면적인 인물이며 개성이 없는 꼭두각시에 가깝다. 에밀리는 사랑의 대상으로서 아무런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에 가까운 인물이다 (Wasserman 206). 또한 팔라몬과 아르시트는 에밀리를 연모하는 젊은이라는 사실 외에는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엘리자베스 로우(Elizabeth Rowe)는 이 두 젊은이가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름없다고 (176) 설명하고 있으며, 존 피날리슨(John Finalyson)은 세 사람이 모두 “비성격화”(de-personalized) 된 존재라고 단정하고 있다 (129).2) 설령 사랑 이야기가 팔라몬과 아르시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진행하고 굴절시키며, 극적으로 꾸며가는 주체는 바로 테세우스이다. 이런 점에서 테세우스를 질서 부여자로 정의하고 있는 피날리슨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테세우스는 작품 전체를 통해서 사건을 조정하고, 불의를 바로 잡으며, 질서를 회복시키고, 팔라몬과 아르시트를 재결합시킴으로써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런 모든 점에서 그는 서사시나 비극보다는 오히려 지위와 조화를 잃었다가 회복하는 패턴이 반복되는 로망스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131-32)


로우는 한걸음 더 나아가 테세우스를 신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사이야기」에서 그의 역할은 지대하며, 비록 그가 성격의 발전을 거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테세우스는 작품 안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또한 그가 팔라몬이나 아르시트와는 달리 고전적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들 중 하나라는 사실과 함께) 테세우스는 처음부터 「기사이야기」의 전개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179)


그러나 테세우스를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부여하는 질서와 조화는 언제나 더 큰 무질서와 혼돈을 불러들이며, 그가 장악하고 있는 통솔력은 궁극적으로 작품에 화합과 조화를 만들어내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테세우스는 누구인가? 그는 “아테네의 통치자, 군주이자 통솔자” (Of Atthenes he was lord and governour)로서 “당대 가장 위대한 정복자였으며, 태양아래 그보다 더 막강한 존재는 없었다” (And in his tyme swich a conquerour / That gretter was ther noon under the sonne) (861-63). 그런 그가 테베의 여인들이 처한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위해서 테베 정벌에 나선 것은 “그가 진정한 기사였던 만큼” (as he was trewe knyght) (959)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상적인 기사가, 특히 로망스의 세계에서, 억울한 여인들의 원한을 갚아주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시체더미에서 발견된 팔라몬과 아르시트를 아테네의 감옥으로 보내 그 어떤 몸값도 허락하지 않고 영원히 죄수로서 살도록 한 명령도 정복자로서, 그리고 질서의 수호자로서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테세우스의 명령은 단호하고 그에 대한 묘사는 그를 이상적인 기사로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그들을 즉시 아테네로 보내도록

명했고, 그들을 영원히 가두어두라고

지시하였다-그리고 그들에 대한 그 어떤

몸값도 수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 나서

고귀한 공작은 부하들과 고향으로 향했다,

승리의 월계나무로 왕관을 쓰고서,

그리고 그곳에서 명예와 행복을 누리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and he ful soone hem sente

To Atthenes, to dwellen in prisoun

Perpetuelly--he nolde no raunsoun.

And whan this worthy duc hath thus ydon,

He took his hoost, and hoom he rit anon

With laurer crowned as a conquerour;

And ther he lyveth in joye and in honour

Terme of his lyf

                    (1022-29)


하지만  팔라몬과 아르시트를 “영원히” (Perpetuelly) 가두어두라고 했던 그의 조치나 그가 “명예와 행복을 누리며 자신의 삶을” (in joye and in honour / Terme of his lyf) 살겠다는 의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테세우스는 인간으로서 영원함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또한 통치자/기사로서 자신의 삶을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세우스가 친구와의 신의 때문에 어쩔 수없이 아르시트를 석방하면서 그가 행한 조치--아르시트가 아테네 땅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는 통치자로서 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다. 그러나 아르시트의 귀환과 더불어 “영원히” 가두어 둘 수 있을 줄 알았던 팔라몬의 탈옥은 테세우스의 통솔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브룩크 버간(Brooke Bergan)은 작품에서 팔라몬과 알르시트는 모두 실질적인 혹은 상징적인 좁은 공간에 묶여있다면서 시체더미, 감옥, 신분가장, 숲, 경기장, 죽음, 또는 죄책감 등이 그들을 제한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4). 그러나 이러한 제약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팔라몬과 아르시트 만이 아니다. 테세우스 역시 통치자/기사로서의 역할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러한 제약 때문에 그는 많은 업적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예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없는 것이다.

  숲에서 결투하고 있는 팔라몬과 아르시트를 만나서 테세우스가 취한 행동은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테베의 두 젊은이에 대한 자신의 모든 조치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테세우스는 두 사람에게 즉각적인 죽음을 선포한다: “더 이상 이 일을 개선해보려고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너희들은 막강한 붉은 마스 신에 맹세코 죽음을 맞으리라!” (It nedeth noght to pyne yow with the corde. / Ye shal be deed, by myghty Mars the rede!) (1746-47)  테세우스는 일찍이 시체더미에서 발견한 두 젊은이를 영원히 감옥에 보냄으로써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두 사람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통치권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히폴리타(Hippolyta)와 에밀리를 비롯한 여인들의 간청 앞에서 테세우스의 해결책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간다. 그가 두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정하면서 스스로를 설득하는 논리는 그가 자신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제시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생각했다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 통치자에게 수치가 있으라 

참회하고 두려워하는 자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사자처럼 잔혹하게 군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며, 교만스레

악한 일을 고집하는 사람과 똑 같은 자이다.

그런 경우에 오만과 겸손을 저울질하지 않고

구분 없이 취급하면 은총에 분별력이 부족한 군주이리라.


                            . . . “Fy

Upon a lord that wol have no mercy,

But been a leon, bothe in word and dede,

To hem that been in repentaunce and drede,

As wel as to a proud despitous man

That wol mayntene that he first bigan.

That lord hath litel of discrecioun,

That in swich cas kan no divisioun

But weyeth pride and humblesse after oon.”

                            (1773-81)


여기서 테세우스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현실에서 합리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려는 엄격한 통치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상정해놓고 자기 자신을 그러한 모습에 맞추어가고 있는 것이다.

  팔라몬과 아르시트를 용서한 테세우스는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통치자/기사의 역할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다. 에밀리을 두고 싸우는 두 젊은이의 승부에 간여하여 거대한 사건을 지휘하고 제작하는 것이다. 그가 “현안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하여” (forthy I yow putte in this degree) (1841), 그리고 “모든 상반된 호소와 혼란을 종식시키고 명쾌한 결론을 만들기 위해서” (for plat conclusioun / Withouten any repplicacioun--) (1845-46) 발표하는 방안은 결코 명쾌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론적으로 질서부여는커녕 더 큰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왜 일년이라는 기한을 정하고, 두 기사에게 각각 백 명씩의 무장한 기사를 동반하여 다시 그 장소에서 결투를 하여 에밀리의 배우자를 선택한다는 복잡하고도 비효율적인 결정을 한 것인가?

  테세우스가 고안한 경기 방식의 이유를 우리는 그가 건설한 경기장의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팔라몬과 아르시트가 싸웠던 숲을 거대한 경기장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마치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그곳에 문명과 예술을 꽃피우는 것과 흡사한 의미를 지닌다. 이제까지 통치자/기사로서의 단호한 조치를 통해서 팔라몬과 아르시트의 문제를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테세우스는 이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기사들의 경기를 주관하고 (이 경기는 결투라기보다는 하나의 공연예술에 가깝다), 경기를 치를 경기장을 건설하는데 힘을 쏟는 것이다. 「기사이야기」의 삼 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기장의 건설은 테세우스가 자신의 작품을 공연하기 위하여 얼마나 세심하게 지휘를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윌리엄 프로스트(William Frost)는 테세우스를 “운명의 대리인”(the executant of destiny)이라고 부르며 그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작품은 함축적으로 모든 인간사와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운명과 성스러운 예지를 그와 연관시키고 있다” (131). 프로스트의 주장은 최소한 두 젊은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경기를 구상하고 준비하는 테세우스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테세우스가 결국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뿐 자신이 의도한 질서와 화합을 이룩하는데 실패하는 것을 고려하면, 작품에서 그가 운명의 대리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연출가로서 테세우스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는 그가 경기 직전에 경기방식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군주이신 공작께서는 드높은 사려를 통해

생사를 건 전투에 임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위험하게 한다는 것은 고귀한 혈통을 억누르고

파괴하게 될 것임을 신중하게 숙고하셨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자신의 명하신 바를 변경하려고 이렇게 제안하십니다.


The lord hath of his heigh discrecioun

Considered that it were destruccioun

To gentil blood to fighten in the gyse

Of mortal bataille now in this emprise.

Wherfore, to shapen that they shal nat dye,

He wol his firste purpos modifye.

                    (2537-42)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경기방식을 바꾼다는 테세우스의 발상은 일견 타당한 듯 하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사건의 해결, 즉 팔라몬과 아르시트 사이에서 누가 에밀리를 차지할 지를 결정하는 일이 반드시 두 젊은이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 일임을 고려하면, 경기방식에 대한 그의 제안은 통치자/기사로서의 단호한 판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테세우스가 심혈을 기울여 연출한 경기는 공연으로서는 성공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결국 그의 시도는 팔라몬과 아르시트의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두 젊은이의 운명은 신들의 조작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콜브(V. A. Kolve)는 「기사이야기」를 보에티우스(Boethius)의 ��철학의 위안�� (Consolation of Philosophy)을 극화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141), 머스커틴(Muscatine), 키인(Kean), 위톡(Whittock) 등도 테세우스가 “개인적인 삶과 죽음에 질서를 부여하는 보에티우스적인 시각을 옹호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존재”라고 보고 있다 (Finalyson 144). 캐스키(R. E. Kaske)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테세우스를 “보에티우스적인 지혜의 상징이며 그를 통해서 두 젊은 연인들의 한계가 드러난다”(22)고 주장한다. 이들 비평가들의 견해는 “최초 동인 연설”(First Mover Speech)로 알려져 있는 테세우스의 마지막 연설에 드러나는 보에티우스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가 피해 갈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것,

특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일로 내게는 보인다.


Thanne is it wysdom, as it thynketh me,

To maken vertu of necessitee,

And take it weel that we may nat eschue,

And namely that to us alle is due.

                            (3041-44)


과연 테세우스의 연설은 보에티우스적인가? 테세우스의 “주어진 것을 받아들임” (vertu of necessitee)은 ��철학의 위안��이 제시하는 핵심적인 사상인가? 그의 연설은 팔라몬과 에밀리를 결합시켜 복잡하게 얽혀왔던 모든 사건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야기를 “행복한 결말” (happy ending)로 가져가기 위한 것으로, 그의 시도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윌리엄 우즈(William F. Woods)는 테세우스가 “테베의 여인들이 겪은 괴로움을 동정하여 그들을 일으켜주고 다시 원래의 고귀한 위치를 회복시켜준 것처럼” 작품의 마지막에서 “극도의 슬픔에 빠진 두 젊은이를 결혼으로 하나되게 함으로써 그들을 기쁨으로 일으켜주었다” 고 설명한다 (44). 프로스트도 작품이 마지막에 “정당한 신의 섭리가 혼란스런 인간사를 안정시켜주는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124). 그러나 메릴 파이필드(Merle Fifield)는 테세우스의 연설이 그 내용에 있어서 보에티우스의 철학과 같지 않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테세우스는 질서 안에서 구원을 찾으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무질서를 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95-96). 엘리자베스 살터(Elizabeth Salter)도 역시 테세우스의 연설은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문제로부터의 도피”라고 주장하고 있다 (34). 테세우스가 긴 연설 끝에 두 젊은이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작품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러한 해결방식이 이야기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억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버나드 하더(Bernhard D. Harder)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테세우스는 자신의 주장이 급기야는 보에티우스의 철학과 상치될 정도로 결론을 왜곡하고 있다. . . . 그는 팔라몬을 설득하여 에밀리와 결혼하도록 하려는 자신의 목적에 맞도록 일부러 보에티우스적인 결론을 뒤집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의 유사 보에티우스적인 연설 (moc-Boethian speech)은 ��철학의 위안��에 드러난 심오한 철학적 시각에 비해서 대단히 부족하다. (47)


로우는 「기사이야기」가 질서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무질서에 관한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고 (169), 버간은 작품의 이면에는 무질서라기보다는 “질서의 왜곡”(perversion of order)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11), 과연 작품은 질서와 조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결말을 맞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테세우스가 화자인 기사를 이상적인 기사의 모습으로 설정한 주인공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테세우스가 질서부여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야기의 화자인 기사의 실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문에 이름 없이 등장하는 기사는 초서의 설명에 의하면 기사가 된 이래 평생토록 “기사도, 진리, 명예, 관용, 그리고 예절”(chivalrie, / Trouthe and honour, fredom and curteisie) (GP 45-46)을 추구해온 완벽한 기사이며,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낸 용감한 군인이다. 그러나 초서는 그를 훌륭한 이야기꾼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비록 그처럼 뛰어났지만, 그는 현명했다.

그리고 그의 몸가짐은 처녀처럼 온순했다.

또한 그는 아직까지 평생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든지 험악한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And though that he were worthy, he was wys,

And of his port as meeke as is a mayde.

He nevere yet no vileynye ne sayde

In al his lyf unto no maner wight.

                    (GP 68-71)


순례자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기사가 사회자인 해리 베일리(Harry Bailey)의 말대로 “가르침과 흥미를 동시에 갖춘” (of best sentence and moost solaas) (GP 798)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작가인 초서의 예술적인 선택이며, 처음 이야기인 「기사이야기」가 질서와 조화를 상실한 채, 해결보다는 더 큰 문제를 제기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테세우스를 주인공으로 소개한 기사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거창한 것으로 의도하고 있다는 점과 자신의 역량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내비친다. 테세우스의 경력과 그가 겪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묘사를 생략한다고 선언하면서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시다시피, 내가 경작해야 할 땅은 더 크고,

내 소들은 그처럼 막대한 일에는 나약하기 때문이오.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는 참으로 길다오.

내 이야기로 함께 가는 일행들을 더디게 하지 않겠소.


I have, God woot, a large feeld to ere,

And wayke been the oxen in my plough.

The remenant of the tale is long ynough.

I wol nat letten eek noon of this route.

                            (886-89)


화자인 기사는 자신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될지, 혹시 자신의 이야기가 듣기에 지루하지 않을 지에 대해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는 길고 지루하며, 예술적 통일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의 이야기는 “오큐파시오” (occupatio), 즉 자신에게 시간이 있었더라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고 독자들에게 말하는 이야기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제 1부에서 기사는 네 번이나 이야기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서 해야 할 이야기를 생략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테에베로 진격하는 테세우스를 묘사하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ther is namoore to telle) (974)고 말하는가 하면, 구체적인 전투 장면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 (But shortly for to telle is myn entente) (1000)라고 설명을 단축하고 있다. 또한 팔라몬과 아르시트가 에밀리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에서도 기사는 그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에 대해서 “내가 시간만 있었다면 서술했을 테지만 요점만 간추리겠다” (If that I hadde leyser for to seye; / But to th'effect.) (1188-89)고 말하고, 테세우스와 페로테우스(Perotheus)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술을 생략하겠다” (But of that storie list me nat to write) (1201)고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전략을 고려한다면 기사의 이야기는 당연히 간결하고 요점이 정리된, 통일된 이야기이어야 하겠으나, 사실상 그의 이야기는 그와는 정반대로 길고 산만하여 질서나 조화와는 거리가 멀다.

  작품의 제 2부에 이르러 이야기의 진행과 서술의 템포가 빨라지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부여하고 싶은 기사의 자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3부에 이르러 우리는 기사에게서 기존의 이야기 진행과 서술의 템포에 대한 자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테세우스가 건설한 경기장에 대한 묘사를 시작하면서 (이는 전체 이야기의 거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분량이며 엄격히 말해서 이야기의 진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서술이다) 기사는 청중들의 흥미를 거의 무시한 채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인다.


만일 내가 공작이 그처럼 제왕적인 공연을 위한

시합장을 건설하면서 세심하게 지휘하고

또한 아낌없이 쓴 경비에 대해 잊어버린다면,

무책임하다고 책망을 들을 것으로 생각되오.


I trowe men wolde deme it necligence

If I foryete to tellen the dispence

Of Theseus, that gooth so bisily

To maken up the lystes roially.

                    (1881-84)


심지어 그는 경기장에 대한 묘사를 마친 후, 경기장의 세 곳에 지어진 신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깜빡 잊을 뻔했다면서 다시 긴 서술을 이어간다.


그런데 나는 언덕 위에 높이 솟아있는

신전들을 장식하기 위하여 거기 있는 초상화들과

형상들, 조각품들과 여러 인물상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잊고 있었소.


But yet hadde I foryeten to devyse

The noble kervyng and the portreitures,

The shap, the contenaunce, and the figures

That weren in thise oratories thre.

                    (1914-17)


자신의 청중들이 대부분 성직자이거나 중산층 평민인 것을 고려한다면 경기장이나 신전, 또는 신전의 장식물들에 대한 서술은 그들에게 흥미가 없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한 기사는 이제껏 의식해왔던 청중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로서 기사의 갈등과 문제점에 대하여 루시나 힐브링크 (Lucina Hilbrink)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단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손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자신의 소재를 먼저 선택한 기사는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싸움에 말려들면서 이야기꾼과 청중 사이의 갈등으로 번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청중들에게 흥미를 주고 싶고 (또한 그렇게 하여 상을 받고자 하는), 세속적인 순례자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자신의 지위에 걸맞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며,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권위”(auctoritee)와 수사학, 그리고 세심함과 “고귀함”(gentilesse)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신이 이룩한 것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은 창작보다는 실제 일을 보고하고 허구보다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망과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39)


과연 기사는 청중들에게 흥미를 주고 동시에 그들에게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의도를 모두 성취하려고 애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두 의도에서 모두 실패하였고, 이러한 실패는 예술가/시인으로서 그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가 때로는 생략하겠다고, 때로는 자세히 서술하겠다고 선택하는 내용들은 사실상 이야기의 청중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더구나 그가 테세우스의 마지막 연설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임”의 지혜는 자신이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보에티우스 철학의 진수를 설파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기사이야기」가 아르시트의 입을 통해서 제시한 인생의 문제, 즉 “이 세상은 무엇이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What is this world?  What asketh men to have?) (2777) 하는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결국 기사는 진정한 교훈을 전달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로우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기사이야기」는 기사의 유사-보에티우스 적인 세계관에 대한 풍자이며, 기사가 테세우스를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군사적 귀족주의의 이상이나 귀족적 도덕주의를 전달하는 대신, 반대로 그러한 기사도적인 이상주의가 어떻게 무질서한 자연에 의해서 유린당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82).

  기사가 테세우스의 긴 연설에 이어 팔라몬과 에밀리의 결혼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것은 스스로 이야기를 통제하는데 실패하고 성급한 결말을 맺은 인상이 짙게 보인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 청중들이 기사의 이야기가 “고상하며, 그 영광스러움을 기억할 만하다” (a noble storie / And worthy for to drawen to memorie) (MP 3111-12)면서 “특히 신사 계급을 즐겁게 했다” (And namely the gentils everichon) (MP 3113)고 평했다는 순례자 초서의 증언에는 그러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거나 교훈적이라는 서술이 빠져 있다. 이어지는 방앗간 주인(Miller)의 술주정에는 어쩌면 비현실적이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기사의 이야기에 대한 서민의 분노가 서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출가로서 테세우스의 실패나 시인/이야기꾼으로서 기사의 실패는 작가인 초서의 실패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초서는 「기사이야기」가 예술작품으로서 실패하도록 의도한 장본인이다. ��캔터베리이야기��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기사의 이야기가 질서와 조화의 성취에 실패하면 할수록 그 다음 이야기들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며, 방앗간 주인의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기사의 이야기에 대한 멋진 패러디가 되는 것이다.

  기사의 책무가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라면 예술가의 책무도 그러하다. 무질서와 혼돈을 정복하고 자연에 질서와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기사와 예술가의 임무이다. 팔라몬과 에밀리의 결혼으로 자신의 일을 마무리하고, 그러한 결말에 만족하는 테세우스나 청중을 의식하지만 끝내 예술가/이야기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기도취에 빠지는 기사의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인 초서의 의도를 엿보게 된다. 결국 “이 세상은 무엇인가” (What is this world)에 대한 초서의 대답은 ��캔터베리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 담겨 있을 것이지만, 그 대답이 만족스럽던 그렇지 않던 간에 우리는 작품에서 인생에 대한 손쉬운 해답을 부정하고 예술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인생의 여러 가지 단면을 비추어줌으로써 독자들이 나름대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투철한 작가 정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서울여자대학교)



주요어: 제프리 초서, 기사이야기, 테세우스, 군주, 시인, 오큐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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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Lord and the Poet: Theseus and the Knight

in The Knight's Tale


Inju Chung


In The Knight's Tale Theseus, an ideal ruler and knight, functions as a controller who provides order and meaning to the chaotic and accidental events, while the knight-narrator functions as a poet who gives artistic order and unity to the tale he tells.  The two ideal knights, however, somehow fail to fulfill their roles as providers of order and unity to the tale.  Despite his struggle to judge and act according to his own principles as a lord and ideal knight, Theseus has to face another larger disorder and chaos everytime he thinks he has resolved the problems.  The more he tries to provide an answer to the situation, the more the events become entangled.  It seems that chance, accident, or fate almost always betrays his attempt to give order to a situation.  Theseus's failure as an order-giver is closely related to another failure that belongs to the knight-narrator.  By presenting Theseus as an ideal knight figure, the narrator attempts to be a good poet who provides a story with both entertainment and moral lesson.  But he also fails to control his own story and thus ultimately is unable to make his work an artistically successful entity.  Paradoxically, however, these narrative failures reflect artistic success for Geoffrey Chaucer as a poet.  By making his characters fail to provide the order and harmony in their roles, Chaucer is refusing an easy solution to the problems of life or a comprehensive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this world?"  In The Knight's Tale Chaucer intends to present much more questions and problems than it pretends to provide answers.


Key words: Geoffrey Chaucer, The Knight's Tale, Theseus, an ideal ruler, knight-narrator, occupatio.


1) 본 논문에 사용된 텍스트는 벤슨 (Benson)이 편집한 1987년 판 The Riverside Chaucer 이며 추후부터 모든 본문의 인용은 각 이야기의 줄임말과 행 번호로 밝힌다. 또한 모든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2) 학자와 비평가들 사이에는 팔라몬과 아르시트가 궁극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견해와 서로 명확히 구분되는 성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Wasserman (220, note)를 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