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기억, 회복: 중세 싸이클 드라마에 나타나는 ‘몸’의 의미 연구

- 요크 싸이클과 타운리 싸이클을 중심으로*1)




최 예 정





1. 싸이클 드라마와 중세의 ‘몸’


현대 독자들이 중세 싸이클 드라마를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세 영어 그것도 주로 북부 방언의 중세영어를 읽는다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설령 그러한 언어적 어려움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현대 독자들의 감수성이나 문학에 대한 기대와는 배치되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가령 싸이클 드라마의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싸이클 드라마는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를 다룬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의 수난 부분을 다루는 부분이 왜 그렇게 많은가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관객들로 하여금 예수의 수난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하고 또 참회하는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려는 목적인가 보다’고 이해하려 하면 싸이클 드라마의 인물 형상화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거룩하게’ 그려져야 할 것 같은 인물들이 매우 희극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희극적인 요소를 넣었나 하고 생각하면 앞의 에피소드에서는 신앙심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였던 희극적인 인물이 뒤의 에피소드에서는 갑자기 엄숙한 신앙의 선조로 표현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수난을 다루는 에피소드들에서는 잔혹한 장면이 너무 많고 길게 나온다. 폭력의 잔혹성에 대해 경계심을 갖도록 교육받은 현대 독자로서는 이러한 장면들이 몹시 거슬리게 느껴진다. 요컨대 극의 구성에 있어서나, 정조에 있어서나 인물 형상화 그 어느 것을 따져 보아도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은 중세 싸이클 드라마의 이와 같은 상반되는 특성들이 중세의 몸에 관한 독특한 관점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싸이클 드라마의 특징들은 얼핏 보기에는 전혀 상호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상호무관성과는 달리 몸에 대한 중세 특유의 다층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본 논문에서 주장하려는 바이다.

몸에 대한 푸꼬(Michel Foucault)의 선구적인 연구가 나온 이래 몸은 더 이상 자연 그대로의 몸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 의미체로서 인식되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몸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중세 시대의 몸의 의미를 구성함에 있어서 중세의 신학이 큰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중세 신학이 몸의 의미를 구성해 나갔다고는 하지만, 사실 중세 시대의 ‘몸’이란 때로는 연관되는 의미의 망을 형성하는 장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상호모순되는 여러 관념들이 결합되거나 교차하기도 하는 복잡한 기호였다는 점이다. 고프(Jacques Le Goff), 브라운(Peter Brown), 바이넘(Caroline Bynum)과 같은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중세는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몸의 상징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을 만들어나간 시대였다. 롬퍼리스와 스탠베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중세는 ‘성육신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의해 지배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시기였다(Lomperis and Stanbury, vii). 말씀(Word)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였으므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것은 융합되고 상호침윤될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몸은 신과의 영적인 결합을 방해하는 무거운 짐으로도 인식되었다. 영과 육은 상호 대치되는 것으로 가르쳐졌고 신앙의 성장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은 육적인 것으로 치환되어 억압과 경계의 대상으로 상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세의 몸은 맥락과 전개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다층적, 다기적 의미의 기표인 동시에, 상이한 의미가 전개되고 교차하는 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러한 다양하고 다층적이며 상호 모순되기까지 한 여러 의미들이 어떤 방식으로 관련을 맺고 틀을 짜 나가면서 층위를 형성하는가에 따라 몸이라는 기호는 각각의 구체적인 경우에서 다른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

본 논문은 싸이클 드라마가 갖는 몇 가지 특징들, 특히 현대인들의 문학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위에서 언급한 특징들이, 중세 신학이 몸에 부여하는 다양한 의미들의 결합의 결과임을 밝히려고 한다. 중세 신학이 몸에 다층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의미들 중 몇몇은 심지어는 상호 모순되기까지 한 상황에서, 이러한 다중적 의미가 싸이클 드라마에는 몸이라는 기호 위에 공존하게 되었다. 즉 몸이라는 기호에 서로 다른 의미들이 중첩되고 결합되면서 현대 드라마와는 다른 종류의 관심과 원칙을 드러내는 드라마가 창출되었으며 그 결과 기독교․인간․연극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 본 논문의 시각이다. 즉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가 싸이클 드라마에서는 몸이라는 기호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몸의 고통과 기억이 궁극적으로는 몸과 인간 자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을 강조하게 되며, 이러한 해석은 몸, 여성, 인간, 구원에 대한 좀 더 포괄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본 논문은 주장하려고 한다. 동시에 이러한 해석은 싸이클 드라마 공연이라는 행사 자체와 그 공연 주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본 논문은 주장하려고 한다.



2. 중세 시대의 ‘몸’의 다층적 의미


중세 기독교는 ‘몸’에 관한 상이한 의미체계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이한 의미체계 속에서 생성된 함축적 상징들은, 그것들이 갖는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중세 기독교라는 큰 틀 속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혹은 상호무관하게 공존해왔다. 중세의 몸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영과 육을 대립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었다. 신의 거룩함에 다가서고 현세의 속박과 죄성에서 벗어나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영혼과 육체를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광범위하게 확대 재생산되었는데, 이러한 이분법적 틀 안에서 몸은 영혼에 비하여 열등하고 구원에의 도달을 방해하는 부적절한 무거운 짐이요, 속히 떨쳐버려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은 남성/여성, 이성/감정 등의 중세 시대의 다른 중요한 유비관계들과 결합하여 또 다른 의미가 부착되면서 폭발적인 의미의 증폭현상을 일으켰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중세 사회에서 남성을 영혼과 이성에 유착시키고 여성을 육체와 감정에 유착시키는 이항대립의 비유 구조는 대단히 환영받을 수밖에 없는 가르침이었고, 따라서 신학적 담론이나 설교와 같은 공식적, 종교적 통로를 통해서 뿐 아니라 민담이나 이야기집과 같은 비공식적이고 비종교적인 통로를 통해서도 몸을 경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관점은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되었다.

한편 사회에 대한 중세인들의 인식에 있어서도 ‘몸’은 중요한 개념적 틀을 제공하였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사회 혹은 공동체는 몸에 비유되었고, 공동체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담당하는 사회적 기능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신체의 일부분으로 비유되었다. 각각 다른 기능을 맡고 있는 신체의 각 조직들처럼 사회의 구성원들도 상호 조화로운 협력관계를 유지할 때만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조직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유기체적 사회관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조응, 혹은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와 국가, 도시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왕은 머리에, 백성들은 손과 발에 비유하게 되면, 전체의 생존을 위해 머리에 해당하는 왕의 명령에, 발과 손에 해당하는 각 구성원들이 따라야 한다는 점을 손쉽게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중세시대의 자아 인식에서도 ‘몸’은 영혼만큼이나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세시대에 전해져 오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라고 믿어졌던 ��인상학��의 가르침에 따라 중세 후기에 이르면 사람의 인상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이 성립되었다. 이 이론에 따라 사람의 외모의 여러 특징들이 범주화되고 인상의 각각의 특징은 일정한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의 배후에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중세의 고전적 사상이 자리한다. 즉 몸이라는 외적 기호를 통해 개인의 진정한 자아, 혹은 영혼의 본질이라는 내면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몸은 이제 진리에 다가서게 하는 통로로서 혹은 기호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몸은 점차 종교적 경험의 중요한 장으로서 인식되는 경향을 보였다. 12, 13세기에 이르러 성흔(stigmata), 피를 흘리는 성체, 금식, 썩지 않는 시체 등에 관한 기적담이 유포되고 강조되면서 육체는 지상과 천국을 매개하는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Bynum, 13). 천국의 이미지는 종종 분할된 육체가 통합되고 육체의 부패성을 극복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었으며, 단테의  ��신곡��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죄를 범했던 육체나 덕을 쌓았던 육체는 그 공과에 따라 사후에도 육체에 그 흔적을 안게 된다고 생각되었다(Bynum, 224- 238). 이러한 생각 뒤에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만은 아니며 영혼과 육체가 통합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예수의 재림 이후 육체가 부활한다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는 바로 이러한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채찍질 고행(flagellation)이나 금식과 같은 종교 행위들도 육체성을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성을 고양하여 육체를 신성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통로로 만들겠다는 생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육체가 영성에 대립적인 것이 아니며 영혼과 육체는 상호보족적으로 신성을 향하여 나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육체관이 가능했던 것은,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성육신을 기초로 세워진 종교이기 때문이다. 신이 육체가 되어 이 세상에 왔다는 것, 인간은 그 육체인 성체를 먹어야 신과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은 육체와 신성의 분리를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육체가 이와 같이 신성의 통로가 될 수 있으려면,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겪었던 것처럼 인간의 몸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이 중세 시대에는 깔려 있었다.

몸과 구원, 특히 몸의 고통과 구원에 관한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 내용은 성체에 관한 교리와 성찬식의 집행에 가장 집중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실상 몸에 관한 이러한 중세의 관점은 싸이클 드라마의 공연의 계기이자 공연 시점이었던 성체축일(Corpus Chrtisti Day)이 기념하는 교리이기도 했는데, 예수의 육신의 현재적 현현인 성체를 먹음으로써 신과 맞닿을 수 있다는 성찬의 교리는 인간의 몸이 신의 몸과 만날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인간의 몸으로 변했던 신의 몸을 먹어 신의 몸을 인간의 몸의 일부분으로 만들 때, 불완전한 인간의 몸이 다시 완전한 신의 몸의 일부분으로 융해되어 완전한 합일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신의 몸을 먹는다는 행위는 한편으로는 식인적인 야만성을 뜻하는 동시에 가장 거룩한 행위이며, 동시에 성육신과 십자가의 수난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당했던 신의 고통을 인간 안에 내면화하고 인간의 육체로 그 신의 고통을 끌어안는 행위이기도 하다. 성체를 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당했던 신의 고통에 인간이 동참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구원의 길은 고통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이 일을 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은, 예수의 고통이 ‘기억’이라는 다음 단계와 결합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한다. 중세 시대의 기억(memoria)은, 기억하면 단순한 암기 정도를 떠올리는 현대인의 기억관과는 매우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중세 시대의 기억은 단순한 사실 암기 차원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인식 작용으로서, 글이 내면화되어 인격과 생각의 일부로 ‘소화’되는 과정 자체를 의미하거나, 혹은 기억의 대상을 분류하고 저장하고 필요한 곳에서 적절한 내용을 떠올리게 하여 마음속에 일종의 그림으로 재현시키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일련의 사고 과정을 포괄하는 매우 중요한 지성의 기능이었다(Carruthers, 9-10). 기억은 책과 사실에 대한 암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윤리적, 영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기능이었다. 기억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신중함의 덕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만약 예수의 고통을 신자들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고 인격의 일부로 이루어지도록 자극하며 또 그 고통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부추기는 기억의 역할이 없다면, 사실상 예수의 고통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역으로 예수의 고통이 기억될 때 곧 인간의 궁극적 회복이라 할 수 있는 구원이 가능해진다.

인간의 진정한 영성, 신성의 회복, 다시 말하면 낙원의 회복을 위해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기억의 행위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중 가장 적극적인 행위는 예수의 고통을 인간의 몸 위에 재현함으로써 예수의 고통을 인간의 몸에 각인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가 ��교회의 위계��(Ecclesiastical Hierarchy)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간은 고양되어 신성의 영역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비물질적인 것에 물질적인 것이 옷을 입혀” 지각할 수 있는 상징들을 통하여 물질적으로 신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재인용. Kobialka, 212). 신적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물질적 존재는 인간의 몸이고, 결국 인간의 몸은 신의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신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러한 기억을 통하여 온전한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싸이클 드라마는 인간의 몸이 고통과 기억의 장으로서 회복의 매개자가 된다는 점을 재현하여 다시금 “비물질적인 것에 물질적인 것의 옷을 입[히는]” 또 다른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3. 싸이클 드라마에 나타난 예수의 몸


싸이클 드라마에는 유독 몸이 고통과 수난의 대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고 몸에 고문과 폭력이 가해지는 장면도 많다. 현대인들에게는 잔혹하게만 보이고 심지어는 불필요하게까지 보이는 이러한 고통의 장면들은, 고통이 곧 구원의 필수적 출발점이라는 중세 특유의 인식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2) 싸이클 드라마에서 예수가 심문을 받고 채찍질을 받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것은 중세의 고통의 미학 속에서만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요크 싸이클에는 예수가 심문받는 에피소드가 4개나 나오는데, 특히 안나스와 카이바스 앞에서 예수가 심문받는 장면에서는 예수에 대한 심문이 곧 육체에 대한 고문으로 이어져서, 정신적 폭력과 육체적 폭력이 동질적인 것임을 암시한다(Enders, 52-53). 이 때의 심문과 고문은 모두 예수의 육체에 숨겨진 ‘진리’를 탐문하려는 행위이다. 안나스와 카이바스는 계속해서 예수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말하지만, 예수는 자신은 이미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백주 대낮에 이야기했다고 말하며 직설적인 대답을 거부한다. 안나스와 카이바스는 심문을 통해 진실을 토설받고 싶어하지만 예수는 답변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고문이라는 또 다른 종류의 심문을 받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예수는 사실상 스스로 고문을 촉발시키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몸에 대한 이러한 폭력과 고통은 결국 예수의 몸에 자신이 구세주임을 각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 동시에 자신이 구세주임을 증명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폭력과 고통이라는 예수 수난의 드라마의 궁극적 저자는 예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싸이클 드라마는 예수가 고통받는 장면을, 연속하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몸의 고통이 인간 구원의 필수요소임을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폭력/고통의 장면은 어떻게 연출되는가? 요크 싸이클에서는 예수의 수난을 다루는 에피소드가 8개나 된다. 그 중에서도 요크 싸이클은 다른 싸이클 드라마에서와는 달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장면만을 떼어 하나의 에피소드로 독립시켜 공연한다. 「십자가에 못박기」의 대화는 주로 예수를 어떻게 십자가의 크기에 맞게 당기고 늘어뜨려서 제대로 예수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가에 관한 기술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극에서는 네 명의 병사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대부분 균일하게 두 행씩으로 배분된 대사를 하는데 이들의 관심은 오직 십자가 처형이라는 일 그 자체일 뿐이며, 처형당하는 예수는 그들의 일의 대상이자 도구로서만이 인식된다. 지금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전혀 모른 채 십자가 처형이라는 과업을 효율적으로 솜씨있게 집행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이들의 대화는 끔찍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하는 행위의 폭력성에 전혀 무관심한 그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로테스크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장면에 대해 논했는데, 가령 콜비(V. A. Kolve)는 제식화된 대화속에 구현된 고문자들의 루딕적인(ludic) 게임이라고 설명하는 등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장면의 양식화된 성격을 지적한다. 그러나 바틀릿(Martin Bartlett)이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이 이 장면의 병사들의 대화는 물리적인 행동을 할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장치일 확률이 많다.3) 배우가 공연 도중 사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안전하게 십자가에 묶되 관객들에게는 실감나게 십자가 처형 장면을 연출하다보니,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자체에 대한 현실감있는 대사를 즉석에서라도 만들어 말할 수밖에 없었고 이 대사가 거꾸로 다시 대본에 들어갔으리라고 보는 벡위쓰의 해석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설득력 있다(Beckwith, 68).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만 하는 이 장면 이면에는, 십자가 처형이라는 물리적 작업을 현실감 있게 재현하고 예수의 몸의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할수록 예수의 수난과 구원의 의미가 더욱 강렬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싸이클 드라마에서 고통과 폭력 장면이 빈번한 것에 대해, 단지 중세인들이 현대인에 비하여 조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중세에는 사람들이 구경거리(spectacle)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거나, 타인이 고통받는 장면을 봄으로써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핵심을 빗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4) 싸이클 드라마 속에서 대사가 한 줄 있은 후 예수를 때리고 다시 대사가 한 줄 이어진 후 예수를 때리는 식으로 해서 주로 몸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은 고문 장면을 현실감있게 그림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가장 박진감있게 재현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5) 싸이클 드라마의 예수의 수난부는 관객들로 하여금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법률적인 심문과 고문, 구경거리, 공개 처형 등과 같은 극적인 요소를 사용함으로써 고통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구원의 드라마의 진실성을 가장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예수의 고통은 인간의 기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고통의 의미가 소실된다. 따라서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의 우주적 역사이자 신의 섭리의 드라마인 동시에 인간의 구원의 원형과 여정을 다루는 극이기도 한 싸이클 드라마는 인간의 기억이 구원의 핵심적 순간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억의 순간은 인간의 몸에 관한 중세의 다층적 인식이 중첩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억을 통해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므로 이 기억은 마치 계시가 그렇듯이, 극 중 인물과 관객 양쪽 모두가 새롭게 고양된 지각을 갖도록 만든다.

신을 향한 기억의 기제로서 인간의 몸이 가장 확실하게 작용한 예는 바로 부활한 뒤의 예수의 몸이다. 라틴어 제식극인 「누구를 찾고 있느냐」(quem queritis)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고 또 그것을 확대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 싸이클 드라마의 「부활」극은 빈 무덤, 즉 몸의 부재를 통해 고통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 몸이 새로운 정체성과 본질을 지닌 몸으로 변했음을 웅변한다. 예수가 자신의 부활한 몸을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들에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들, 특히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보여주는 장면들은 신성이 각인된 기표로서의 예수의 몸의 의미를 증명하는 순간이다.


형제여 그대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도마야, 이제 나를 주의깊게 보거라.

너의 손가락을 이제 내게 집어 넣거라.

너는 나의 손을,

내가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어떻게 나무 위에서

못이 박혔는지를 보거라.


내 상처들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을 보거라;

여기 내 옆구리에 네 손을 넣거라,

그리고 내 상처들을 만져 보거라

그리고 이것이 나라는 것을 알거라.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불신을 버리고

진실로 믿거라.6) 


이 장면에서 예수는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신학적 담론이나 구약의 예언과 같은 정신적․영적 설명체제에 의존하지 않는다. 불신에 가득 찬 도마에게 건네는 예수의 발언은 위의 두 개의 연뿐인데, 이 두 연은 모두 육체의 증거를 보여준 후 다시 영적 진리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와 상처, 구멍과 같은 볼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육체적 특질들은 십자가의 희생, 부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영적 진리의 증거로 변환된다. 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예수의 고통은 인간의 기억 속에 저장되고 도마의 진정한 내적 변모를 촉발시킨다. 몸은 고통의 대상이자 주체이었으나, 이제는 기억의 기제로서 인간을 회복으로 인도하는 매개물이 된다.



4. 인간의 몸의 의미의 변화


신의 신비한 섭리와 계획의 증거이자 도구로서 인간의 몸이 사용되는 가장 극적인 예는 아마도 마리아의 몸일 것이다.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은 현실세계의 제약을 넘어서는 신의 섭리와 능력의 상징으로서, ‘동정’으로 표상되는 몸의 완전성에 인간의 몸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간의 몸의 구원과 회복의 상징이다. 동정과 임신이라는 병립 불가능한 두 개의 상태를 동시에 보여주는 마리아의 몸은, 신의 계획과 섭리의 현장인 동시에 인간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현장이다. 평범한 인간의 인식으로는, 동정녀라는 육체적 조건과 부풀어 오르는 배라는 또 다른 육체적 현상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셉이 고민하고 마리아를 의심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싸이클 드라마에 묘사된 요셉의 모습을 보면, 요셉이 천사의 방문으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마리아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면에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 외에도  여성에 대한 중세의 뿌리깊은 부정적 관념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전통적인 유비관계에서는 여성은 항상 감정, 충동, 육체성, 육욕, 통제불가능한 성적 방종 등과 연결되어졌으므로, 요셉에게는 마리아의 부풀어 오르는 배가 바로 여성의 이러한 특징들의 증거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요  셉: 하지만 마리아, 당신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당신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거요,

당신의 배가 항상 드러내고 있소

당신이 남자와 잤다는 것을.

그게 누구의 애요?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된거요?

마리아: 이 애는 당신의 아이이고 하나님의 뜻이어요.

요  셉: 아니야, 난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소.

그런 얘기는 더 하지 마시오. 조용히 하란 말이오!

당신도 나만큼이나 잘 알지 않소,

우리 둘이 같이 육체적으로

그런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오.

그래, 당신은 내 뒤에서 나 모르게

당신의 아름다운 처녀성을 망쳐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적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누가 애비요? 그 놈의 이름을 내게 말하시오.

마리아: 당신 외에는 없어요.

요  셉: 맙소사, 그런 소리는 집어치워요.

                            (York, 13:163-177)

 

요셉과 마리아의 대화는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평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요셉이 마리아에게 아기의 아비가 누구냐고 집요하게 묻는 이유는 그녀가 “아름다운 처녀성을 망쳐”버렸음을 그녀의 “배가 항상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셉은 육체의 차원에서 질문을 계속하는 반면, 마리아는 반복하여 이것이 “당신의 아이”라고 말하면서도 신의 뜻과 질서를 언급하며 신의 차원, 하늘의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요셉은 그녀의 육체를 그녀의 육욕과 육체성의 확실한 증거로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여성의 육체의 순결을 정신의 순결과 동일시하는 시각, 그리고 성행위는 여성을 “망쳐버리고” 더럽히는 행위라는 시각과 중첩되어, 마리아의 몸의 변화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시켜 버린다. 요크 싸이클이나 타운리 싸이클의 경우 모두, 마리아와 함께 있던 여인들은 마리아를 찾아 온 남자가 아무도 없었고 단지 천사만 찾아왔었다고 말하지만,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과 편견으로 차 있던 요셉은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요크 싸이클의 요셉은 심지어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내면서도 “하지만 그건 그녀일 수가 없어. 그러므로 난 내가 속았다는 걸 알아”(York, 13: 63-64)라고 말하면서 그 예언과 현재 상황과의 연관성을 부인한다. 타운리 싸이클의 요셉의 발언은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천사가 이런 일을 했다구?

그런 핑계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여자들이 그렇게 할 수는 없거든.

세상에, 천사는 천상의 존재야,

그런데 그녀는 땅에 속했다구; 그러니 그럴 리 없어,

그건 어떤 다른 남자일거야.7)


천사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하고 예언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상황에 올바르게 적용되지 못한 채 불완전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은, 그가 “천상의” 것과 “땅에 속한” 것의 경계를 너무나 확실히 구분짓고 있기 때문이다(Coletti, 71). 여성의 몸은 땅에 속해 있고 그것은 천상에 속한 것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몸, 그중에서도 여성의 몸을 세속성, 육체성과 동일시하는 이러한 시각은, 신의 섭리의 매개물이자 인간의 몸의 궁극적 회복의 기제로서의 몸의 가능성에 관한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냐고 다구치며 묻는 요셉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채 당신의 아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마리아의 반응과, 너는 누구냐고 묻는 안나스와 카이바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이미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대답을 되풀이하는 예수의 반응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안나스와 카이바스의 심문이 결국 예수의 몸에 숨어있는 진리를 탐문하려는 정신적 고문이며 그것은 곧 실제로 육체적인 고문으로 이어져 고통을 부과했던 것처럼, 요셉의 심문 역시 마리아의 몸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탐문하려는 정신적 고문이었고, 천사를 통한 계시가 없었더라면 마리아로 하여금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는 육체적 고문을 당하게 만들 수 있는, 고통을 부과하는 행위였다. 이렇게 보면 마리아가 아니라 바로 요셉이 안나스와 카이바스처럼 땅에 속한 인물이요, 육체에 속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여성과 육체성과의 일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예는 싸이클 드라마에 여러 번 등장한다. 가령 싸이클 드라마의 여러 등장인물 중 여성의 육체성을 잘 구현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아의 부인을 들 수 있다. 여러 싸이클 드라마에서 노아가 방주를 만든 후 홍수가 임박했음을 알고 노아의 부인에게 방주로 들어오라고 할 때 노아의 부인은 이를 거절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녀의 거절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고집, 통제할 수 없는 괄괄함, 영적 의미에 대한 무지, 신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 육체성과 죄성의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사실 성경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러한 인물 형상화는 여성성을 세속성, 육체성, 영적 의미에 대한 무지로 규정하는 중세의 여성관/육체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가령 요크 싸이클의 경우를 보면 「방주 짓기」에서는 노아 역시도 신의 뜻에 둔감하고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나서 자신은 “너무 늙고 힘이 없어서 정말 절실한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York, 8:50-52)고 말하면서 신의 명령을 거부하는가 하면, 그래도 방주를 지어야 한다고 신이 거듭 명령하자 “우선 저는 배 만드는 일을 모른다구요”(York, 8:67-68)라고 말하며 다시금 꽁무니를 빼는 태도를 보인다. 이와 같은 노아의 태도는 인간에 대한 신의 섭리와 심판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변호해 줄 수 있는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노아를 변호해 준다면 마찬가지의 근거로 노아의 부인도 변호할 수 있도록 대부분의 싸이클 드라마에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가령 체스터 싸이클이나 요크 싸이클, 타운리 싸이클에서 노아의 부인은 왜 방주에 타야 하는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방주에 오르도록 지시받는다. 요크 싸이클의 경우에는 노아는 배를 만드는 것을 계속해서 부인에게 비밀로 하고 있다가 「홍수」에서 배를 타는 날이 되자 아들들에게 위험이 임박했음을 알리면서 부인을 부르라고 말한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부르기는 하지만 위험이나 홍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배에 오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노아의 부인이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떻게 된 것인지 어안이 벙벙하여 “당신은 내가 이 단단한 땅을 두고 이런 정신없는 혼란 속에 배에 탈거라고 생각하느냐”(York, 84면 9:77-78)고 묻는 것은 사실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이성적인 판단이라 말할 수 있다.8) 노아의 부인의 반응은 추상적인 교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에 대한 불순종일지 모르지만, 싸이클 드라마의 구체적인 극적 맥락 속에서 바라본다면 합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Epp, 232). 이렇게 본다면 「방주 짓기」에서 왜 방주를 지어야하는지 이유를 모른 채 명령을 받았을 때 불평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노아의 모습과 「홍수」에서의 노아의 부인 사이에서는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게 된다.

사실상 노아의 부인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요셉이다. 노아의 부인이 노아와는 달리 신의 뜻에 대해 아무런 사전 설명을 받지 못한 채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요셉 역시 신의 계획에 대해 전혀 미리 이야기를 들은 바 없이 갑자기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노아의 부인의 거절을 육체성으로 해석한다면, 요셉의 의심과 불평도 육체성으로 해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아의 부인은 항상 육적인 불순종의 인물로 해석되었던 반면에 요셉의 경건함은 의심되지 않았다. 이것은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노아, 노아의 부인과 요셉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처음에는 모두 불평하며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택하려고 한다. 노아는 배 만들기를 거부하고, 노아의 부인은 배에 타기를 거부하며 요셉은 마리아의 설명을 무시한 채 마리아를 버리고 몰래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 한다. 육체성을 ‘영적 의미에 대한 둔감함’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노아와 요셉같은 남성 등장인물들도 노아의 부인만큼이나 육체성을 구현한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존의 여성성, 육체성에 대한 정의는 상당한 정도로 수정, 보완되게 된다(Coletti, 73). 현세를 살고 있는 인물들은 근본적으로 신의 섭리에 둔감할 수밖에 없고 유한한 존재로서 눈앞의 일 이외의 것을 제대로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남녀를 막론하고 현세의 인간은 모두 ‘육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모두 고통을 겪게 된다. 노아와 노아의 부인처럼 서로 치고 받는 육박전을 치르며 실제로 몸의 상처를 얻게 되기도 하고, 요셉처럼 부인에 대한 의심과 자신의 늙은 몸에 대한 무력감,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겪으며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되면 흔히 희극적이라고 생각되는 타운리 싸이클들의 몇몇 에피소드들은 육체성을 지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 혹은 육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타운리 싸이클의 「첫 번째 목자극」이나 「두 번째 목자극」에서는 목자들이 요즘 들어 살기가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물론 이 장면은 관객의 공감과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목자들이 경험하고 또 관객들도 경험하고 있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재연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은, 남녀 모두 육체를 지니고 땅의 법칙에 매여 사는 까닭에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신의 섭리를 깨달아 기억해 갈 때 동료 인간과의 관계 회복, 신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통한 낙원의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남녀 모두 동일하게 육체의 한계 속에 매여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리고 신도들은 남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로 비유되어 왔기 때문이다. 싸이클 드라마에서의 인물 형상화는 남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육체성과 여성성을 가졌음을 보여줌으로써, 남자와 여자 모두가 똑같은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남녀 모두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여인인 아름다운 신부가 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한다. 남녀 모두가 다시 하나의 몸을 이룬다는 사실은, 공동체가 한 몸으로 비유된다는 사실과 다시 연결점을 만들어준다. 싸이클 드라마의 상연은 몸으로서의 공동체가 함께 고통의 장면을 재현하고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기억을 만들어 가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한편 공동체가 ‘몸’이라는 사실은 싸이클 드라마의 상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상 드라마 공연에서 몸이 갖는 중요성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극의 공연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 전달의 수단은 물론 대사이겠지만, 배우들의 연기, 다시 말해서 그들의 ‘몸’이 대사에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 전달의 수단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극의 ‘정신’과 ‘진리’는 배우들의 몸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전달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몸은 극의 의미의 구성체이자 구현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싸이클 드라마에서 배우들은 예수의 수난, 예수의 고통을 몸으로 연기함으로써 직접 예수의 수난에 참여하게 된다. 마치 성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또 채찍질 고행이 그러했던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의 몸에서 인간과 신성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드라마 공연 자체가 몸의 고통의 체현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드라마 상연이라는 행사는 기억의 행사로 바뀐다. 배우와 관객은 신과 인간의 고통을 재현하는 드라마를 통해 구원의 교리를 보다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의 눈과 마음에 새기게 된다.9) 싸이클 드라마 상연은 마치 성체축일의 행렬같이, 그 드라마를 상연하는 공동체를 구원과 회복으로 이끄는 기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싸이클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시 당국이 드라마의 성공적인 상연이 시의 ‘영광’이라고 여겼던 것은 무리가 아니다. 드라마 상연은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끄는 진정한 의미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5.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싸이클 드라마에는 몸에 관한 중세의 다층적인 함의들이 교차한다. 특히 구원을 고통, 기억, 회복의 축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싸이클 드라마의 구성과 인물 형상화, 그리고 고통의 장면의 연출에 중요한 구성 원리로 작용한다. 몸의 고통이 구원의 핵심 고리를 이룬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싸이클 드라마에는 몸에 고통을 가하고 몸이 고통을 당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예수의 수난 부분은 고통과 회복의 드라마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예수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고통은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고 인간의 회복을 이루게 되는 길이기 때문에 가감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고통을 잔인하고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은 구원의 드라마를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한 필수적 장치가 되는 것이다.

한편 몸을 영혼에 비하여 열등하고 인간의 구원에 부적절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영적인 눈을 갖지 못한 육체적인 관점으로 제시된다. 여성을 몸, 육욕, 육체성과 연결시켜 생각하던 중세의 유비관계의 사고 구조는 인간의 몸이 구원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싸이클 드라마는 여성을 육체성과 동일시하는 시각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싸이클 드라마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고 인식되던 것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가령 현대인들의 관점으로는 ‘거룩한’ 인물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노아나 요셉 역시 육체성의 한계를 지닌 인물임을 보여 줌으로써 결국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은 모두 육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육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다만 여기에서 기억을 얻게 될때 진정한 회복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녀 모두 육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깨달음은 남녀 구별 없이 결국 그리스도 앞에서는 하나의 몸을 이루며 또 몸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공동체를 몸으로 보는 태도는 싸이클 드라마의 상연에 관한 태도에 영향을 준다. 즉 드라마 공연 자체가 신의 고통을 배우의 몸에 재현하는 행위이고 신의 고통을 기억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드라마 상연은 공동체 전체의 회복을 위한 기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세 신학이 몸에 부여하는 상호 독립적인, 혹은 상호 모순되기까지한 여러 의미들이 싸이클 드라마에는 교차한다. 싸이클 드라마는 몸의 고통, 기억, 회복이라는 틀로 구원의 교리를 재조직함으로써 몸의 이러한 다층적 의미들을 절합한다. 몸의 이러한 상징적 의미들의 교차, 결합, 공존은 현대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생소하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을 낳게 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몸과 고통에 대한 긍정적 관점을 열어주고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교정하며 싸이클 드라마 상연의 가치를 새롭게 조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호서대학교)




주요어: 싸이클 드라마, 몸, 육체성, 고통, 기억, 회복, 여성, 신성,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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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uffering, Memory and Restoration:

The Meaning of 'Body' in the Cycle Plays

of the Middle Ages

- Focusing on the York Cycle and the Towneley Cycle


Yejung Choi


This study begins with a three-fold premise: 1) in the middle ages a web of abstract ideas was overlapped on the figure of the body 2) that cycle plays are a site in which divergent symbolic meanings of the body intersect, opening a new perspective of the body and the Christianity and that 3) this intersection results in some 'alterior' features in the cycle plays.

This essay argues that the cycle plays carry the view that bodily suffering combined with memory is a prerequisite of the restoration of the body, a community and the mankind and that this view projects an overall structure, characterizations, and the production of suffering scenes in the cycle plays. A belief that bodily suffering is indispensable to salvation has led to the production of many pageants dealing with Christ's passion which display cruelty and violence. Cruelty, violence, and grotesqueness were regarded as indispensable for the vivid representation of the suffering of the body and for the inscription of Christ's suffering in the minds of spectators.

This essay also argues that cycle plays make problematic a medieval assumption which identifies the woman with the body and corporeality. By showing that both a man and a woman have corporeality, cycle plays blur the traditional distinction of masculinity and femininity. Cycle plays reveal that not only a woman which has been identified as a corporeal being but also a man constitute a community which has been symbolized also as the body. Such an idea of a community as the body enables to interpret the performance of cycle plays as a ritualistic practice: actors enact the suffering of Jesus with their own body and the performance itself is transformed into an act of 'memory' which is believed to facilitate the restoration and salvation of the community which produces the cycle plays. 




Key words: cycle plays, body, corporeality, suffering, memory, restoration, woman, divinity, community.


1)* 이 논문은 2001년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작성된 것임.(2001-003-A00133)


2) 싸이클 드라마에 나오는 고문이나 잔혹한 장면에 대해 엔더스(Jody Enders)는 중세의 법학과 수사학 이면에는 ‘고통 속에 진술된 발언은 진리를 담보한다’는 생각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고문을 받고 얻어낸 진술은 법적 판결의 외재적, 사실적 증거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몸이 말을 한다’(Body talks)고 생각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몸의 고통과 진리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사상은 “[중세] 연극의 관객으로 하여금 신비극이나 기적극, 심지어는 소극에서 교훈적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종류의 ”진리들“을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수단으로서 폭력을 극적으로 재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또 그러한 극적 재현을 장려하였다” Enders, 4.


3) Martin Bartlett, 'The York 'Crucifixio Cristi.'" Master's thesis, U of York, 1987. Beckwith, 에서 재인용.


4) Huizinga. 참조. 그 외에도 중세의 구경거리와 중세 극과의 연관성을 연구한 연구성과로는 Hanawalt, Barbara & Kathryn L. Reyerson eds.. City and Spectacle in Europe; Hanawalt, Barbara & David Wallace eds.. Bodies and Disciplines: Intersections of Literature and History in Fifteenth-Century England. 등을 들 수 있다.


5) 법률적인 심문과 고문, 구경거리, 공개 처형 등의 요소가 구경꾼들로 하여금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은 요소를 예수의 수난을 다루는 에피소드들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엔더스는 강조한다. (Enders, 58)


6) Richard Beadle ed. The York Plays. 41:169-180. 앞으로는 본문의 괄호 속에 York라고 쓰고 행수를 병기하기로 한다.


7) Martin Stevens and A. C. Cawley eds. The Towneley Plays. 10:293-298.


8)  Alfred David이나 Rosemary Woolf를 위시하여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노아의 부인의 세속성의 징후로 파악하였다. 특히 David은 노아의 부인과 악마가 연루된 것으로 그리고 있는 「뉴우캐슬의 배 만드는 사람들의 극」과 그 극의 근거가 되는 외경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David. "Noah's Wife's Flood."


9) 스티븐즈(Martin Stevens)는 요크 싸이클이 ‘시 드라마’(city drama)라고 말하면서 공동체와 싸이클 드라마가 밀접하게 연관되는 예로서 주로 요크 싸이클을 든다. 그는 특히 「예루살레 입성」 에피소드를 논하면서 예루살렘 시민들이 모두 나와 예수를 맞이하는 장면에서 요크는 예루살렘이 되는 셈이라고 말한다. Stevens. 28면, 50-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