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과 공유: 조너선 스위프트의 광기




전 인 한





  이 글의 제목에서 “조너선 스위프트의 광기”라는 표현은 문제적이다. 언뜻 보면 스위프트 자신의 광기를 지칭하는 듯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스위프트가 이해하는 광기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스위프트의 광기’라는 표현은 스위프트가 미쳤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이를 부정하기도 한다. 왜 제목에서부터 모호함을 자초하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위프트와 광기간의 복잡한 관계를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라는 표현의 애매모호함 혹은 이중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즉 광기를 규범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한, 스위프트는 광기 이해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스위프트와 광기의 관계에 있어서는 광기 이해의 주체와 객체의 안이한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기에 이 글은 ‘스위프트의 광기’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앞 문장에서 필자는 “광기를 규범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첫 번째 목적은 18세기 후반 이전에 광기를 이해하는 방식은 오늘날의 이해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스위프트의 광기 이해에도 오늘날과 다른 당대의 인식이 배경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따라서 이 글에서 논하는 광기라는 것은 18세기의 기준에 따른 광기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 목적은 스위프트가 그의 여러 문학작품을 통해 지적하고 저항한 것이 바로 이러한 18세기적 광기이해의 방식이라는 이 글 논지의 출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글은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을 광기로 보았던 초기근대영국사회의 전반적인 이해와 스위프트가 광기를 인식한 방식 사이에는 역동적인 긴장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스위프트는 광기에 대한 당대의 이해와 자신의 인식 사이의 충돌에서 당대 사회를 비판할 공간을 찾았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1. 탈규범으로서의 광기


  따라서 이 글은 초기근대사회까지의 광기에 대한 이해가 규범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광기가 17세기 이전에는 종교적 측면에서의 악으로 이해되던 것이나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사회적 표준에 적응하려는 이성에서 일탈된 것으로 인지되던 것은 모두 광기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는 교정되어야 될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을, 다시 말해 광기 규정의 규범성을 적시한다.1)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광기 규정에 있어 17세기 후반부터 그 규범성이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는 바, 전 시기에 종교적․정치적 열정으로 인해 내전을 겪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정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을 사회통합의 기제로 함양하는 것을 사회․문화적 기획으로 삼은 17세기 후반,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사회통합의 규범인 이성을 저해하는 모든 것을 광기로 간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기 때문이다. 로슨(George Rosen)이 “이 시기의 [정신]병원은 주로 아픈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보면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 . . 자신의 사회적 지위, 직업 혹은 가족관계에 적당하다고 간주되는 질서를 저해했거나 혹은 그로부터 일탈한 자를 위한 격리된 사회적․심리적 공간을 창출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광기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이성과 이성의 올바른 사용이었다”라고 정리하는 것은 이 시기의 광기의 규정과 이에 기초한 정신병원의 사용이 얼마나 규범지향적․규범유지적이었는지를 적시한다(Rosen 159, 163, 164).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안녕에 위협을 가하는 어떤 것도 광기로 간주될 수 있음은 물론이며, 이는 이 시기의 정신병원이 특별한 정신적 병증이 없어도 기존의 사회질서에 위협이 되는 ‘환자’들을 받아들였다는/가두어놓았다는 사실(史實)에 의해서 뒷받침된다고 하겠다.2)

  이 시기의 광기 이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이 시기가 지나친 공상(fancy)이나 집착(obsession)을 광기와 연결시킨 것이다. 17세기의 사상가 커저본(Meric Casaubon)이 같은 주제에 대해 계속적이고 강렬한 집착을 가진 사람은 머리가 이상하게 되어 그 주제에 대해 미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병든 공상”(sick imagination)은 사물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면서 “사실”(things outward)에 대한 이해를 결정한다고 주장한 것이나(Casaubon 114, 116, 17; 146), 모어(Henry More)가 하나에 대한 집착 때문에 지각이 무력화된 광인의 마음속에서는 “편집적인 공상”(obsessed imagination)이 사물에 대한 이해를 저해한다라고 주장한 것(More 4-5), 그리고 홉스(Thomas Hobbes)가 “견고함이 결여되고 어떤 목적에 대한 방향성이 없는 . . . 거대한 공상(great fancy)은 광기의 한 종류이다”라고 인식한 것은(Hobbes 1: 8), 모두 이 시기가 공상과 편집이 광기와 연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공상이나 집착이 광기와 연결되어 이해되었다는 것은 이 시기 광기 이해의 규범지향성을 더욱 강조한다. 공상이나 집착은 어느 한 대상에 대한 침잠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성적인 교통을 통한 온건하고도 교양 있는 사회 건설을 이데올로기화한 18세기의 기획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던져야 될 질문은 이런 규범지향적인 광기의 정의와 이를 통한 광기의 통제가 과연 이성적인 사회 건설에 공헌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겠다. 필자의 주장은 적어도 스위프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스위프트는 광기의 이해에 있어 당대사회의 기준에 따르면 자신이 광인임을 통감하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광기로 정의된 정신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정상적임을 그리고 얼마나 창조적임을 보여줌으로써 규범과 연관된 광기의 정의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임을 지적한다. 스위프트는 광기를 정의하고 통제하는 규범지향적인 사회에서 또다른 광기를 발견하는 셈이다.



2. 화자의 광기? 작가의 광기? 광기?


  스위프트가 당대사회의 광기 이해에 도전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작품에 나타난 화자의 광기를 과연 스위프트에 연결시킬 수 있는가라는 해묵은 의문에 다시 도전해야 한다. 만일 작가 스위프트와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1726)의 4부 「후이늠으로의 여행」(A Voyage to Houyhnhnms)에서의 걸리버를 완전히 분리한다면, 그리고 분변시 씨리즈(scatological poems)의 주인공, 예를 들자면 「숙녀의 화장실」(The Lady’s Dressing Room, 1730)의 스트레폰(Strephon)과 작가 스위프트를 완전히 분리한다면, 화자/작중인물들의 광기와 스위프트는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광기의 이해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간 구별의 붕괴를 통해 당대사회에 대한 스위프트의 도전을 읽어내려는 이 글도 존립 근거를 상실하게 됨은 물론이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에 스위프트 작품의 역동성에 대한 이해는 화자와 작가간 관계가 간단치 않다는, 즉 화자와 스위프트를 동일시하는 것도 오류이나 또한 화자와 스위프트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오류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이것은 야후의 언어이다. 괴물이 질러대는 비명, 이를 북북 가는 듯한 인간에 대한 저주. 겸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인간다움과 수치심을 넘어서는. 생각에 있어서 더럽고, 광포하고, 난삽한 . . . 이 목사가 비록 위대한 거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 사람을 야유할 것을 나는 주장한다”는 쌔커리(William Thackeray)의 평이나(Thackeray 10: 406), “스위프트의 위대함은 그의 모든 작품을 관류하는, 그가 인간을 혐오하는 핵심인 바로 그 ‘인간의 육체성’ 증오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폭력에 있다”는 헉슬리(Aldous Huxley)의 주장은(Huxley 10: 101), 모두 4부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걸리버의 인간혐오와 여기서 근원하는 광기를 작가 스위프트로 직접 연결시키는 데서 연유한다.

  화자 걸리버가 4부에서 인간을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있으며 그의 극단적인 인간혐오는 광기로 연결된다는 이해에는 일견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후이늠국에서 후이늠의 우월한 이성과 인간의 야후성을 인식한 걸리버는 분명히 인간혐오에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국에 귀환하고 난 후 가족과의 만남을 역겨워 한다던지(253-4),3) 가족과의 만남을 역겨워한 나머지 마굿간에 두 마리의 어린 종마를 사다놓고 그들과 지내는 것을 선호한다던지(254) 하는 것은 그의 인간혐오를 잘 보여준다. 특히 4부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그들이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인 한 내 가족이라는 야후를 가르치기 위해 그리고 내 모습을 자주 거울에서 보고, 그래서 가능하다면 점차로 인간의 모습을 참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걸리버의 말은 그의 인간혐오가 자신의 모습조차 견딜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259).

  그리고 걸리버의 이러한 인간혐오에서 독자들은 광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인간을 혐오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혐오하게 된 나머지 그가 말처럼 행동하거나 걸으려고 노력하는 사실이나(243), “내가 우연히 호수나 연못에 비친 나의 반영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고개를 돌렸으며, 내 자신보다는 보통의 야후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참을 만했다”(243)는 그의 토로에서 인간의 내적 성정에 대한 혐오가 내적 성정과는 무관한 인간의 외양에 대한 혐오로 발전하는 것(243), 아니면 자신을 구해준 뒤 자신을 따듯하게 대해주는 멘데즈(Pedro De Mendez)선장과 선원들을 기피하는 사실(249-52) 등은 모두 걸리버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리버가 광기에 휩쓸린 인간이라고 해서 걸리버의 창조자인 스위프트도 자동적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이라고 보는 것은 두 측면에서 오류를 노정한다. 첫 번째는 작가 스위프트가 화자 걸리버에게 작품의 도입부에서 역사적 스위프트와는 분명히 다른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자신과 화자간의 공식적인 거리를 확보했다는 것을 무시하는 오류라고 하겠다. 두 번째는 이 작품에서 스위프트가 걸리버를 자의적으로 사용하면서 그를 풍자의 주체로 뿐만이 아니라 객체로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걸리버 여행기��의 1부 「릴리펏으로의 여행」(A Voyage to Lilliput)에서 걸리버가 스위프트의 관점을 충실히 반영하면서 풍자의 주체로서 릴리펏의(즉 인간세계의) 우행을 비판하는데 반해, 2부 「브롭딩낵으로의 여행」(A Voyage to Brobdingnag)에서 걸리버는 당대인들이 문명의 성과로 내세우는 것을 브롭딩낵 국왕에게 자랑하다가 그 문명의 성과라는 것의 저열함을 비판당하는 그래서 “자연이 이 땅의 표면을 기어다니도록 감내한 혐오스러운 작은 해충 중에서 가장 사악한 무리”(108)의 대표자가 되면서 오히려 풍자의 객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3부에서 다시 걸리버가 풍자의 주체로 복귀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4부에서 걸리버가 풍자의 주체가 아닌 스위프트에 의해서 풍자당하는 객체일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걸리버와 스위프트간의 기본적인 거리를 인지하지 못한 채 걸리버의 광기를 스위프트로 그대로 전이시킨 쌔커리나 헉슬리의 이해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스위프트와 걸리버의 완전한 분리는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스위프트의 광기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안전한 분리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필자가 주장컨대, 스위프트에 있어서 광기 이해의 주체와 객체의 분리는 불가능하다. 필자는 스위프트가 광기를 다루면서 광기에 대한 비밀스러운 집착의 혐의를 드러낸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닌 바, 이런 식의 논지는 입증도 불가능할뿐더러 굳이 이런 식으로 논증할 필요도 없이 스위프트는 그가 광기를 다룰 때에는 광기에 빠진 화자의 말에 부정하기 힘든 진실을 섞어놓아 그와 화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어놓기 때문이다. 다시 ��걸리버 여행기��로 돌아가면, 4부에서 우리는 스위프트와 화자 걸리버 사이에 확실한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걸리버가 후이늠국에서의 그의 행복을 인간 세상의 타락과 비교하는 다음 문장은 나중에는 주술성까지 획득하는 당대 영국의 타락의 끊이지 않을 것 같은 열거를 통해 당대영국 사회에 대한 그의 분노가 실은 타당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육신의 완벽한 건강과 마음의 평정을 즐겼다. 나는 친구의 배반이나 변절, 그리고 드러난 혹은 숨은 적의 모략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권력자나 혹은 그의 하수인의 호의를 얻기 위해 뇌물을 바치거나, 아첨 혹은 뚜쟁이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사기나 탄압에 대항하여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존재들이 없었다. 내 몸을 망칠 의사, 내 재산을 파멸시킬 법률가. 나의 말이나 행동을 감시하고 혹은 고용되어 나에 대한 고발을 위조할 밀고자. 조롱하는 사람, 트집잡는 사람, 뒤에 가서 헐뜯는 사람, 소매치기, 노상강도, 도둑, 변호사, 난봉꾼, 광대, 도박꾼, 정치가, 재사, 성마른 사람, 지겹게 말하는 사람, 논쟁꾼, 강탈자, 살인자, 강도, 그리고 거장인 채 하는 사람. 당이나 붕당의 지도자나 추종자. 유혹이나 예를 들면서 악행을 부추기는 자. . . . (241-42)


  만일 우리가 스위프트와 걸리버를 완전히 분리해낸다면, 그래서 걸리버를 풍자의 객체로만 이해한다면, 4부에서 걸리버가 행한 인간비판 자체가 무효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4) 다시 말해 걸리버라는 화자의 말에 가끔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걸리버를 단순히 광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걸리버의 간헐적인 진실을 그의 광기와 함께 한꺼번에 무시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걸리버를 스위프트와 완전히 분리된 화자로 간주하여도 그의 말의 간헐적 진실은 인정될 수 있으며,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인간의 결점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그의 극단적인 인간혐오를 풍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즉 걸리버는 당대사회의 타락에 대한 그의 인식은 스위프트와 같다 할지라도 그 교정가능성에 대해서는 스위프트와 궤를 달리하는 그래서 스위프트와 확연히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그리고 스위프트는 그가 교정을 포기한 것을 풍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일리가 있다. 스위프트와 걸리버를 완전히 분리하면서도 걸리버의 진실을 무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리버를 스위프트의 궁극적 풍자의 대상으로 보는 이러한 해석은, 즉 4부에서 미친 걸리버와 정상적인 스위프트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이러한 해석은 걸리버가 인간을 극단적으로 혐오하고 있다는 이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만일 걸리버가 극단적으로 인간을 혐오하고 있지 않다면 그래서 4부에서의 그의 이상한 광기는 어느 정도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4부‘후’의 걸리버의 모습이 역사적 스위프트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면 걸리버와 스위프트를 완전히 분리하려는 이런 해석은 그 근간이 흔들린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광인이 된다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이는 그의 인간혐오가 극단적이어서 그의 행동이나 생각이 당대의 규범에서 심하게 일탈해있다는 가정에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과연 걸리버는 극단적으로 인간을 혐오하고 있는가? 필자는 걸리버가 인간을 혐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의 인간혐오에는 타당성이 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보다는,5) 우리가 ��걸리버 여행기��를 논할 때 흔히 간과하는 이 작품 집필의 논리적 순서를 짚어봄으로써 걸리버의 극단적인 인간혐오를 부정하려 한다. 즉 이 작품은 걸리버가 그의 모든 여행을 끝마치고 난 뒤에 씌어진 형식을 취한다는 것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인간혐오를 찾아볼 수 없는 1, 2, 3부도 모두 후이늠으로의 여행이 끝나고 씌어졌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4부에서 걸리버의 극단적인 인간혐오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만일 진실로 걸리버가 인간을 상대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도대체 그는 왜 수고스럽게도 이 작품을 쓴 것인가? 그는 인간을 극도로 혐오한 나머지 인간을 상대하지 않기로 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가 후이늠으로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의 ‘모든’ 여행에 대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그가 아직도 교정의 의지에서든 아니면 저주의 목적에서든 어느 정도 인간 세상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가 아닌가? 후이늠으로의 여행이 그의 이해의 결정판이라면 1, 2, 3부의 이야기는 왜 하는가? 4부에서의 그의 극단적인 인간혐오는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변화하는 여러 태도 중의 하나일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이 작품 집필의 논리적 순서를 고려하면 그래서 4부후의 걸리버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는 걸리버가 극단적인 인간혐오에 빠진 사람이 아님을 그래서 그의 광기는 진정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전략일 가능성이 높음을 인식하게 된다.6) 그리고 4부에서 걸리버의 말에 간헐적인 진실이 있다는 점을 위의 사실과 함께 고려한다면,  걸리버가 사실 미치지 않았다는 인식은 그가 실제로는 상당 부분 작가 스위프트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는 더 나아가 ��걸리버 여행기��를 관류하는 걸리버(작품 내에서의 걸리버와 작품을 집필하는 걸리버 모두를 통합하는 걸리버)와 스위프트 사이의 형식적 구분을 뛰어넘는 실체적 구분은 불가능하다는 이해와 연결되게 된다.

  그렇다면 걸리버는 스위프트가 아니기도 하고 스위프트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걸리버가 끝나고 스위프트가 시작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의 ��걸리버 여행기��비평은 걸리버의 광기를 당연시하고 화자와 작가 사이의 거리유무에 집중하면서 걸리버의 광기가 스위프트의 광기로 해석될 수 있느냐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감히 주장컨대 ��걸리버 여행기��에서 화자와 작가가 형식적으로만 구분되든 실체적으로까지 구분되든 우리는 걸리버의 광기가 스위프트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고민할 수도 없다. 걸리버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미치지 않았을진대 우리는 스위프트의 광기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3. 화자/작가의 광기


  앞에서 필자는 걸리버는 미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필자는 걸리버의 광기를 논하면서 ‘의도적’으로 그의 절대적인 정신적 병증에만 집중하면서 광기의 당대적 개념인 상대적인 탈규범성은 논지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던 바 18세기의 광기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이 사회의 통념이나 규범에 맞냐에 의해 판단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다면(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러한 광기의 이해가 상당부분 남아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걸리버의 광기를 논하면서 그의 인간혐오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걸리버의 생각이 과연 당대인들에게 통념으로 받아들여질 성질의 것이었는가는 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오류이다.

  규범/통념의 개념을 논할 때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이 수의 문제일 터이다. 즉 규범이나 통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그 동의가 자발적인 것이든 강요된 것이든) 다수의 동의는 필수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걸리버의 공격의 절대적인 타당성보다는 상대적인 타당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의 인간 공격이 특정한 일부가 아니라 인간 전반에 대한 것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의 주술과도 같이 길게 열거되는 인간에 대한 공격은 그 대상이 소수가 아닌 인간 일반임을 적시한다. 그렇다면 걸리버의 인간 혐오는 그 자신/소수의 다수에 대한 비판이 되면서 다수에 의해서 거부될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것이다. 물론 공격된 다수가 자신들에 대한 걸리버의 공격에 수긍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나, 4부의 걸리버에 대한 당대나 후대의 혐오감은 걸리버의 공격이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왔음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의 정신적 건강 자체와는 상관없이 그를 광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세기의 정신병원은 사회적 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사람을 환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게다가 걸리버는 분명 인간의 야후성에 ‘집착’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는 사실도 같이 고려한다면, 그의 인간혐오가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의 광기를 판단하는 데 중요하지 않게 된다. 걸리버의 생각은 인간 다수의 평안을 공격하는 극소수의 생각이었고 그는 인간의 야후성에 집착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으므로 그는 광인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와의 거리가 유동적인 즉 그와 완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지 않는 스위프트도 그의 광기에 연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걸리버에게서 광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스위프트에게까지 전가시킨 당대나 후대의 비평은 걸리버와 스위프트간의 명목상의 거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또한 광기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수가 많고 적음의 상대적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오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광인이라는 명목에 한해서는 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걸리버가 더 나아가 스위프트가 광기를 뒤집어썼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실로 광기가 의심되는 스위프트 작품 이해의 근간은 바로 스위프트에 광기가 있느냐 아니냐를 판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위프트가 광기를 어떻게 대하고 광기에서 어떤 역동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광기를 통한 어떤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저작 ��통이야기��(A Tale of a Tub, 1704, 1714)에서 우리는 스위프트가 그의 저작활동 초반부터 자신이 풍자적 저술활동을 하는 한 광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지했으며 그런 불가피성의 인지를 근원으로 광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4. 광기의 불가피성


  ��통이야기��에서 스위프트의 표면적 목적은 로마카톨릭 교회를 대변하는 피터(Peter)와 청교주의를 대변하는 잭(Jack)의 광기(이 작품에서는 증기vapours로 촉발되는 열광phrenzy과 울화spleen로 묘사되는)를 영국성공회를 대변하는 마틴(Martin)의 건전한 상식과 대비시켜 영국성공회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화자(putative author)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는 이러한 해석의 평안함을 저해한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빈 공란이라던지 화자의 논리의 부실함 그리고 수시로 등장하는 여담부(digression)의 터무니없는 내용 등은 결코 독자가 화자를 신뢰할 수 없음을 암시하면서 이 화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내용으로부터 작품의 일관된 논지를 찾아보려는 독자의 노력을 방해한다고 하겠다.7)

  그러나 작품 전체의 일관된 논지는 스위프트 자신이 거부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스위프트의 광기에 대한 이해가 당대의 규범성이 강한 광기의 정의와 궤를 달리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광기에 대한 여담」(A Digression concerning the Original, the Use and Improvement of Madness in a Commonwealth)에서 화자가 내세우는 광기의 판단기준은 바로 수이다. 그는 열광을 통해서만 새로운 사상, 정복, 계획의 수립과 실행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면서 열광을 찬양한다.(346-48)8)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새로운 행동이나 사상의 근저에는 모두 열광이 있는데, 그것이 성공하면 숭앙받게 되고 실패하면 광기로 치부되게 된다는 화자의 주장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머리속 현을 제대로 울리게 되면 그의 생각은 동조자를 얻게 되는 것이고 운이 나빠 그렇지 않다면 그는 광인으로 치부되게 된다고 화자는 주장하는 것이다(349).


당신의 높이보다 높거나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현을 퉁기게 되면, 사람들이 당신의 원칙에 동의하기보다는 당신을 묶고 미친 자라고 부르면서 당신에게 빵과 물을 주게 되죠. . . . 진실로 대담한 사실을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철학자로 통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바보취급 당하는 것은 참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큰 실수라고 할 수 있습죠. (349)


화자의 이런 주장에서 우리는 결국 광기는 상대적인 것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기는 결국 명목에 불과한 것이 되고 광인으로 치부되느냐 아니냐는 자신의 말에 동의할 청중의 확보유무에 달린 셈이 되는 것이다(DePorte, “Fling It All Out of the Windows” 176).

  물론 ��통이야기�� 화자가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이러한 광기해석도 신뢰할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이 18세기가 광기를 규범성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과 본질에 있어서는 거의 동일함을 감안하면, 그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것이 어느 부분에 신뢰의 문제를 초래하는지 불분명해진다. 즉 ‘그의 광기 정의’를 우리가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생각과 당대의 생각이 유사함을 감안해서 당대의 광기 이해가 신뢰할 수 없게 되는지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이다. 필자가 판단컨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입을 통해 나온 모든 언술은 어느 정도 피해를 입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스위프트는 당대의 일반적인 광기 이해를 괴상한 화자가 말하게 함으로써 이러한 이해에 도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화자에 의해, 즉 스위프트의 화자조작을 통해 광기에 대한 정의가 도전받는다는 우리의 의심은 광기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스위프트의 인식이 화자의 행복론을 통해서 부상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이 화자가 칭송하는 행복과 즐거움이란 바로 사물의 표피에 만족하는 즉 현혹속에서 사는 행복에 다름 아니다.


현혹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전달되지 않는 사물은 얼마나 빛 바래고 또한 김 빠져보입니까? 자연의 거울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얼마나 쪼그라들어 보입니까? 이럴진대 만일 인공적인 매체나 가짜 조명, 굴절된 각도, 표면광택, 번쩍이는 금속장식,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의 행복과 즐거움은 엄청나게 줄어들 것입니다. (351)


이것이 잘 속고 있는 상태라고 불리는 것, 즉 행복의 숭고하고 세련된 점이죠. 다시 말하면 악당들 사이에서 바보로 남아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말입습죠. (352)


화자의 이런 행복론은 일견 얼토당토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의 논리는 탄탄하다. 사물의 표피 밑은 추악하며 그 추악한 진실을 교정책도 없이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저번 주에 저는 한 여성이 껍질 벗겨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그녀를 얼마나 더 추하게 변하게 했는지 당신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어제 저는 한 한량의 시체를 주문해서 제 앞에서 껍질을 벗기게 해보았죠. 그 결과 우리는 한 벌의 옷 밑에서 예기치 못한 많은 결점들을 발견하곤 모두 놀랐죠. 그런 후 저는 그의 뇌, 심장, 그리고 비장을 열었죠. 저는 이런 모든 해부에서 깨달았습니다. 더 진행하면 할수록 결함은 그 수와 크기에서 증가하기만 한다는 것을요. 저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습니다. 어떠한 철학자나 제안자든지 자연적인 흠이나 불완전함을 기우거나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결점을 노출시키거나 더 넓히는 (마치 해부를 의술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는) 그래서 현재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이들보다 더 유익한 인간이며 더 유용한 학문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352)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행위가 사물의 아름다운 본질을 밝혀준다면 본질을 파헤치는 행위가 광기로 치부되는 일은 없겠다. 사람들의 동의나 호응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데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싫어할 그들의 추악한 모습을 들이대는 일이며 따라서 호응을 받지 못해서 광인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광기는 새로운 행동이나 사상의 근원이 되는 열광과도 관련이 없는 비생산적인 집착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앞에서 화자도 해부에 관한 구절에서 지적하다시피, 사람들의 호응을 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추악한 진실에 대한 사람들이 받아들일만한 그리고 실현가능한 대안이 있느냐며 이런 대안의 존재는 사물의 표면 밑으로 파고드는 사람 즉 스위프트 같은 풍자가가 광인으로 치부되지 않을 핵심요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통이야기��에서 스위프트는 대안의 전반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이 작품의 줄기라고 할 수 있는 외투 알레고리에서 실현가능한 대안의 가능성에 대한 스위프트의 인식이 엿보인다.  세 형제의 외투 알레고리에서 파헤쳐진 진실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로마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청교주의의 광신을 파헤쳤다고 해서 영국성공회가 진실하고도 행복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외투의 훼손을 둘러싼 사건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외투를 원상태로 돌리고 싶은 잭과 마틴의 욕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한 진정한 대안은 원시 기독교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 상태로의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잭은 외투의 장식을 쥐어뜯다가 외투를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망치고(334), 합리적인 마틴 역시 외투의 복구가 불가능한 것을 깨닫는다.


나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마틴은 수선공이 코트에 대해 끊임없이 가한 변경에 의해서 천을 손상시키지 않고서는 떼어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자수가 빡빡하게 된 부분이나 자수가 코트의 흠을 감추거나 혹은 코트를 강화하는데 쓰이는 부분은 그냥 그 자수들을 남겨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어떠한 경우라도 천이 더 이상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고 말이죠. 그리고 그는 그것이 아버지 유언의 진정한 의도와 의미를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습죠. (333-34)


외투의 손상은 이미 복구불능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진정한 대안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위 문장에서 마틴이 추구하는 ‘가장 현명한’ 행동 그리고 아버지 유언의 ‘진실된’ 의도는 그가 현실과 타협해서 추구하는 것이지 그의 본래의 목적은 아니다. 이는 그가 택한 로마카톨릭 교회에 대한 대안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의 타락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통이야기��에서 마틴이 깨닫는 바, 그리고 스위프트가 통감하는 것은 ‘행복’과 사물의 ‘진실’은 같이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스위프트는 일찍이 현실의 타락에 맞설 실현가능한 대안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회의한 셈이다.

  행복과 진실이 대립항으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화자는 행복을 택한다. 스위프트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진실을 택한다는 것, 그래서 풍자를 계속 수행한다는 것은 다수를 그의 적으로 만듦으로써 그가 광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사물의 추악한 진실을 파헤치는 것과 광인이 자신의 똥을 헤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스위프트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빗자루에 대한 고찰��(A Meditation upon a Broomstick, 1710)에서 개혁자연 하면서 사실은 사물의 질서를 더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폐해의 개혁자와 교정자로, 불평의 해결자로 나선다. 숨겨진 타락을 백일하에 드러내면서, 모든 헤픈 여성의 천성의 구석을 헤집으면서, 그는 그 전에 없었던 대단한 먼지를 일으킨다. 그가 쓸어버리는 척하는 오염을 깊게 공유하면서.9) (Davis 1: 240).


그런데 이 구절의 어구는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의 편지��(Letter of Advice to a Young Poet, 1721)에서 그가 스스로 풍자시인의 교정적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구절, 즉 풍자적으로 씌어지지 않는 구절과 차이가 없다. 


풍자적인 시인들은 비록 그들의 일이 개집을 뒤지고 거리와 가정의 오물을 치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도시에 청소부나 굴뚝청소부처럼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발견했습니다. 그들도 동시에 매우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더러운 사람들처럼 그들이 치우는 것보다 더 많은 오물과 불결함을 남겨놓는다는 것을. (Davis 9: 342)


진실을 파헤치는 자와 광인 사이에 실로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10) 그렇다면 스위프트 자신도 진실을 택할 경우 광인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화자처럼 ‘악당들 속에서 바보로 남아있는 행복’을 택하기보다는 ‘악당들 속에서 광인이 되는 길’을 택한다. 스위프트는 실현가능한 진정한 대안의 존재여부에 상관없이 사물의 진실을 계속 파헤치는 것을 택함으로써 광인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광인으로 만든 세상에 광기를 되돌려준다.



5. 광기의 반납/공유


  ��통이야기��에서 스위프트가 진실을 파헤치는한 광기를 뒤집어쓰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인지하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걸리버의 거침없는 인간혐오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걸리버는 과도하게 인간을 혐오해서 광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의 전반적인 악을 비판하는 순간부터 광인이 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는 광인이라는 것은 짐이 아니라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마음껏 과장해서 할 수 있게 해주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는 순간 광인이 되는 바에야, 광인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데 더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11)

  필자가 주목하려 하는 점은 스위프트가 광기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위프트가 자신의 소수성, 즉 풍자문학의 교정적 성공에는 치명적인 소수성을 받아들인 이후에 그가 어떻게 광기를 이용했는가를 살펴보면 그와 광기간 관계의 또다른 변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프트가 자신의 소수자로서의 위치를 인지하는 증거는 충분하다. 스위프트의 이런 인식은 그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지독하게 저주하는 풍자적인 ��겸손한 제안��(A Modest Proposal, 1729)을 쓴 시기의 다른 직설적인 글들에서 쉽게 찾아진다.12)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들에 대한 답변��(Answer to Several Letters from Unknown Persons, 1729)에서 스위프트의 인식은 세상에 대한 체념과 원망의 형태로 표현된다.


나는 매일 같이 의도는 좋으나 비이성적인 사람들로부터 오는, 현재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내 생각을 조르는 편지에 지쳤다. 사실 나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 대해 내 생각을 전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내 생각을 전하더라도] 기껏 커피하우스에서 열 명이 우연히 내 글을 읽을 때, 그리고 그 적은 수의 사람들조차 모든 생각에 있어 나와 다를 때 도대체 내 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Davis 12: 80-81)


이런 인식에서 나오는 강렬한 감정의 분출은 ��추도서라 불리는 논문에 대한 답변��(An Answer to a Paper called a Memorial, 1728)에서 찾을 수 있는 데 이 글에 나타난 세상에 대한 스위프트의 감정은 거의 저주에 가깝다.


만일 사물의 참담한 상황이 허용한다면, 나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대중에게 헛되이 한 경고를 바라보며 심술궂은 즐거움을 가질 것이다. 모든 면에서 적중되는 결과와 사건을 바라보면서. . . . 지혜가 거리에서 울부짖도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들을 불렀으나 너희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손을 뻗었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도다. 너희들은 나의 충고를 거부했으며, 나의 질책을 귀담아 듣지 않았도다. 나는 또한 너희들의 재앙을 보고 웃을 것이며, 너희들에게 두려움이 왔을 때 너희들을 조롱할 것이다. (Davis 12: 22-23)


  앞의 글들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고 비극적으로 스위프트의 소수성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는 그가 1728년에 간행된 ��인텔리겐써��지(Intelligencer) 3호에서 자신의 풍자문학이 무해함을 변명하는 구절에서 찾아진다. “만일 내가 궁정이나 정부 혹은 의회의 우행이나 타락을 비판한다 해도 그들은 연금이나 직위, 권력으로 충분히 보상받지 않습니까? 나는 기껏해야 친구 몇 명과 함께 구석에서 웃는 것 정도 이상의 보상을 바라지 않는 와중에 말입니다”(Davis 7: 3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구석에서”(in a corner)라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스위프트가 자신의 소수성을 아직 인식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적의 소수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1710년과 1711년에 출판된 ��이그재미너��지(The Examiner) 26호와 37호에서 연이어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권력자를 중상모략하고 당신이 한 일에 대한 엄청난 만족감으로 구석에서 자신을 꼭 껴안는 즐거움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Davis 3: 75). “도대체 국가 전체가 굽실대야만 하는 이 구석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만일 국가 전체의 신용대부도 전체 법을 몇몇의 돈 소매상에게 굽실대도록 바꾸지 않고서는 전쟁비용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Davis 3: 134). 특히 ��이그재미너��지 26호의 글이 ‘망한 명분’(lost cause)에 연연하며 글을 쓰는 작가를 조롱하기 위해 씌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위프트는 자신의 저작 특히 공격적인 풍자문학이 사회의 구석에서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이기적인 소수를 위하여 창조된 독설로서의 풍자문학”(Eilon 36)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에 스위프트는 자신과 광기의 관계에서 자신이 타인에 의해 수동적으로 광인으로 정의되는 것에 도전한다. 그 도전은 소수자를 광인으로 몰아가는 사회에 대한 도전인 바, 그는 그 광기를 사회의 다수에게 되뒤집어씌움으로써 자신에게 씌워진 광기의 유효성에 저항한다. 그러한 저항의 전형을 우리는 스위프트의 말기시 ��리전 클럽��(A Character, Panegyric, and Description of the Legion Club, 1736)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 의회가 교회에 대한 목초세(pasturage tithe)를  폐지하려한 것에 의해 촉발된 그래서 아일랜드 국회의원에 대한 파괴적 분노로 넘쳐나는 ��리전 클럽��에서 우리는 스위프트가 정신병원과 아에네아스(Aeneas)의 지옥방문의 메타포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스위프트는 시의 도입부에서 아일랜드 국회의원을 광인으로 변화시키면서 새로 신축된 아일랜드 의회건물을 새로운 베들럼 병원으로 변화시켜 이해한다.


의회건물은 지속될 것 같으니

국왕의 영이 선포되게 하시오.

클럽은 각자 자신에게 적당한 방에서

거주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각각의 방에 기어들 통로와

위에서 엿볼 작은 구멍도 마련해 놓으시오.


일단 그들이 자신의 방에 들걸랑

그들이 헐값에 나라를 팔게 하시오.

그들이 짚을 뜯는 동안

법 제정에 대해 마음껏 개거품을 물게 하시오.

그들이 말을 그치지 않는 동안

그들이 마음껏 똥을 튀기게 하시오.13) (41-52행)


이후에 스위프트는 의사당에 입장하려는 장면 중 9연에서 스틱스강(Styx)에게 탄원함으로써(84행), 또한 의사당의 수위 캐리(Carey)를 브라이어리어스(Briareus)로 지칭함으로써(103행), 그가 방문하는 국회의사당에 지옥의 성격도 함께 부여한다.

  스위프트가 국회의사당 방문을 정신병원/지옥 방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정신병원의 메타포는 이 시에 충만한 공격대상에 대한 파괴성을 합법화한다. 다음에 인용하는 시행들은 아일랜드 국회의원에 대한 스위프트의 증오심이 조절할 수 없는 위험 수위에 근접해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건물의 꼭대기에서

으르렁대는 천둥이 떨어지는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만일 그가 천둥에 안전하다면

악마가 지붕에서 불처럼 빨간 부지깽이로

돌을 깨고, 납을 흘릴 수만 있다면,

그것들을 모든 두개골에 흘려버릴 수만 있다면,

날강도의 동굴이 가득 찼을 때

그 하피의 둥지를 파괴할 수만 있다면,

그러면 우리나라는 얼마나 축복받은 것이 되겠소? (21-30행)


이런 끔직한 자들에 둘러싸여

나는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소.

그리고 우리가 문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머리를 깨기로 결심했소. (93-96행)


이런 행들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교묘하고 위트 있는 그래서 독자들의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공격을 찾을 수 없다. 스위프트는 단지 실제에서 불가능한 공격대상에 대한 육체적 공격욕구를 문학작품 내에서의 대리처형으로 만족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이러한 파괴적 분노를 억매는 것이 바로 정신병원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의 파괴성과는 달리 리처드 타이(Richard Tighe)와 리처드 베츠워쓰(Richard Bettesworth)에 대한 스위프트의 공격은 정신병원의 메타포가 강하게 개입하기 때문에 파괴적 분노가 느껴짐과 동시에 또한 파괴적 분노를 억누르는 메타포의 힘도 아울러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간수여, 그들을 밧줄로 묶으시오,

그들이 서로 쳐다보고 같이 악취를 풍기게 하시오.

둘 다 광포한 경향이 있으니

매일 그리고 충분히 그들을 채찍질하시오.

비록 그들을 교화하는 것이 희망이 없다하더라도,

전갈몽둥이는 그들을 길들일지 모르오. (153-58행)


물론 이 시행에서 스위프트의 분노는 그 절정에 이를 정도로 파괴적이며 독자들은 이런 파괴성에 진저리를 칠런지 모른다. 그러나 18세기 정신병원에서 광인들을 묶거나 발가벗겨 놓고(당대에는 광인들은 고통을 못 느낀다고 믿었다), 채찍질을 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행들에서 스위프트는 자신의 분노의 파괴성을 당대 정신병원의 관례에 접합시켜 희석시키고 있는 셈이다.14)

  스위프트가 국회의사당 방문을 정신병원/지옥 방문으로 변환시키는 두 번째 의미는 정신병원의 메타포와 지옥의 메타포가 융합되는 이유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필자가 판단컨대 스위프트가 아일랜드의 국회의사당을 정신병원이자 지옥으로 보는 것은 광기에 대한 당대의 이해를 그대로 전용함으로써 자신의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앞에서 중세․르네쌍스 시대부터 광기는 일종의 죄로 여겨져 왔다는 것을 환기하면 정신병원은 이 지상의 지옥이고 따라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자들에 대한 그의 공격은 그들의 죄를 응징하는 것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병원과 지옥은 연결이 되는데 과연 아일랜드 국회의사당과 정신병원이 연결이 되느냐라는 점이겠으며 여기에서 스위프트가 광기를 반납하는 것이 제기된다고 하겠다. 분명히 아일랜드 국회에 대한 스위프트의 의견은 시의 세계에서 소수이다. 아일랜드 국회의원은 이백 명이 넘는 데 반해 국회의사당을 둘러보는 방문자는 잠시 그와 동행해서 그의 분노를 잠재워주었던 클리오(Clio)가 도망간 이후에는 스위프트 혼자이기 때문이다. 수의 많고 적음으로 광기가 판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리전 클럽��에서도 광인은 아일랜드 국회위원이 아니라 그들에게 ‘혼자’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스위프트이다.

  그러나 스위프트는 이 시에서 다수를 광인으로 간주하는 시도를 하면서 당대의 광기에 대한 이해에 도전한다. 비록 소수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리고 다수에 대한 그의 분노가 대단히 파괴적이라는 것도 시를 통해 드러내지만, 동시에 자신의 강력한 분노를 메타포와 수사적 장치로 제어할 수 있음을 아울러 보여줌으로써 광인으로 몰리는 자신의 광인답지 않음을 과시하는 데서 그의 도전은 시작된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마치 더러운 악취가 몸에 밴 듯 분가루를 뿌리고 국회의사당을 뒤로 하는 화자의 모습은 스위프트 자신은 본인의 분노를 잘 조절한다는 것 그래서 분노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한다.


“제발 인내심을 가지시지요, 당신은

진짜 구경거리는 아직 못 보았습니다.

당신은 채 스무 명도 못 보았고

저는 이백 명도 더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간수, 나는 충분히 보았소.”

분가루를 약간 뿌리면서

나는 그들을 휙 둘러보면서, 결론을 내렸소,

그들의 신 악마가 그들을 깨주기를 하고 말이오. (235-42행)


  스위프트가 자신의 파괴적 분노와 그것을 조절할 줄 아는 절제력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비로소 이 시 제목의 ‘리전’이라는 표현에 함유되어 있는 스위프트의 당대사회에 대한 도전이 명확해진다.  광인(더 정확하게는 광인의 몸을 사로잡은 더러운 귀신[unclean spirit])과 예수와의 대화를 기록한 마가복음 5장 9절에서 따온 리전이라는 명칭은 다수는 정상이다라는 개념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이름은 리전이오. 왜냐하면 우리는 많기 때문이오”(마가복음 5장 9절). 다수에게 광기가 씌워지는 순간이다. 스위프트(소수)와 아일랜드 국회의원(다수)과의 관계가 예수(one)와 더러운/미친 귀신(many)과의 관계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스위프트와 광기의 긴 여정은 ��리전 클럽��에 이르러 스위프트가 소수에게 씌워지는 광기를 다수에게 반납함으로써 끝이 난다. ��리전 클럽��에서 스위프트의 전략은 광기와 죄를 연결시키는 당대의 이해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광기를 규범적으로 규정할 때의 소수/다수의 대비구도를 뒤집어 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광기는 소수로부터 다수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에 의해서 광기가 다수에 의해 전유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수는 여전히 소수를 광기로 몰아가고 또한 소수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다수를 리전으로 몰아가는 세계에서는 광기만이 존재하는 광기가 모든 이에 의해서 공유되는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위프트와 광기의 관계는 역동적이다. 스위프트는 광기의 작동원리를 알고 광기를 자신․자신과 분리된 화자․자신/화자가 쓰기도 하고 또한 독자에게 광기의 오명을 부여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스위프트의 개념이 당대의 광기 이해의 작동원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수와 소수 개념에의 천착 자체가 그 역시 다수의 입장에서 일탈하는 소수를 비판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위프트는 적어도 자신이 소수라는 것을 통감하고 난 뒤에는 광기의 유연한 사용에 의해서 광기를 죄와 연결시키는 그리고 사회적 소수와 연결시키는 당대의 광기 개념에 도전을 한 사람으로는 평가될 수 있겠다. 광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풍자적 공격의 근원이었다기 보다는 풍자적 공격의 수단과 결과가 광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는 혐의가 짙기는 하지만.


(서울시립대학교)



주요어: 스위프트, 광기, 규범, ��걸리버 여행기��, ��통 이야기��, ��리전클럽��, 화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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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Writings of Jonathan Swift. Ed. Robert Greenberg. New York: Norton, 1973.

Thackeray, William Makepeace. “Swift.” The Complete Works of William Makepeace Thackeray. 13 vols. London: Smith Elder, 1891.

Tuveson, Ernest. “Swift: The Dean as Satirist.” UTQ 22 (1953): 368-75.

Williams, Harold, ed. The Correspondence of Jonathan Swift. 3 vols. Oxford: Clarendon, 1963.

Williams, Kathleen. “Gulliver’s Voyage to the Houyhnhnms.” ELH 18 (1951): 275-86.

                 . “‘Animal Rationis Capax’: A Study of Certain Aspects of Swift’s Imagery.” ELH 21 (1954): 193-207.

전인한. 「��걸리버 여행기��: 광기의 타당성」. ��안과밖�� 12호 (2002): 158-177.

     . 「독자됨의 비극성: 미로에 빠진 스위프트의 ��통이야기�� 읽기」. ��근대영미소설�� 7집 2호 (2000): 165-187.







ABSTRACT


Giving Back and Sharing: Jonathan Swift's Madness


Inhan Jeon


    By examining Jonathan Swift’s dynamic relationship with madness, the present paper argues that Swift questions and attacks the validity of the normative definition of madness in the contemporary society. Swift, this paper attempts to prove, not only recognizes madness as inevitable odium in his position as an outcast of society but also gives it back to―or attributes it back to―the majority who wields the power of defining madness.

    This paper first tackles the problem of equating Gulliver’s madness in Part IV of Gulliver’s Travels with that of its creator, Jonathan Swift. As long as madness is conceived as a certain mental illness, this paper argues, Gulliver is definitely not mad, so the issue of Swift’s madness is a non sequitur though there certainly exists some kind of nominal difference between him and his persona Gulliver. This paper, however, points to the anachronism of this argument as it establishes that madness was understood as a failure to conform to the norm of the social majority in the eighteenth century.  In view of madness of this kind, Gulliver is indeed mad, as he attacks the corrupted majority of society. Swift, then, cannot escape the odium of madness of this kind, for the recognition that the distance between him and his persona is at best not clear makes him implicated in Gulliver's madness.

    However, the main argument of this paper is not that Swift shares the madness of his persona, but that he not only regards the madness as inevitable but also utilizes the odium of madness as a launch point for his attack on the contemporary society.  For Swift, the dynamics of satire feed upon his conflict with the contemporary society on the issue of madness. This paper maintains that Swift did find the inevitability of madness in his early work A Tale of a Tub; thus from then on Swift strategically uses the madness of his persona (thus his madness) to intensify his persona’s satiric onslaught, freeing him from the prescriptive, and thus restraining, norm of the social majority.

    This is, however, not the end of an on-going saga between Swift and madness. Challenging the definition of madness as a deviation from societal norm, Swift attributes the odium of madness back to society at large in his Legion Club, which, written towards the end of his literary career, defines madness as the state of being simply major in number: he associates himself (one of the chosen few) with Christ (the One), while identifying the Irish MPs (many) ― who indeed formed a majority in the contemporary society ― with the “unclean,” thus mad, spirits of the Bible (many).




Key word: Swift, madness, norm, Gulliver's Travels, A Tale of a Tub, Legion Club, persona, author.


1) 광기 이해의 역사적인 변천에 대해서는 Rosen을 참조할 것. 드포트(Michael V. DePorte)는 17세기 이전에 광기는 “완전히 개인이 예방할 수 있는 ‘영혼의 질병’으로, 즉 열정을 조절하는 데 실패한 궁극적인 결과로서 하급능력에 의해 상급능력이 처음에는 흔들리고 나중에는 파괴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그 일례로 17세기 초반의 설교집 ��신비의 베들럼 혹은 광인의 세계��(Mysticall Bedlam, or the World of Mad-men)에 등장하는 “모든 자의적인 죄는 광증이다”라는 구절을 들고 있다(Deporte, Nightmares and Hobbyhorses 115-18, 16).


2) 이에 대해서는 Neugebauer 477-83을 참조할 것.


3) ��걸리버 여행기��의 텍스트로 필자는 Greenberg ed., Gulliver's Travels, , 2nd ed. 를 사용하였다. 이후로는 본문에 면수만 표기하기로 하겠다. 이 글에 나오는 모든 번역은 필자의 것임을 밝혀둔다.


4) 20세기에 들어서 로스(John F. Ross), 윌리엄스(Kathleen Williams), 몽크(Samuel Monk), 터브슨(Ernest Tuveson) 같은 일단의 비평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스위프트 비평의 성과는 저자 스위프트와 화자 걸리버를 분리해 내고, 걸리버와 스위프트 사이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걸리버의 인간혐오를 저자 스위프트의 것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즉 저자 스위프트와 화자 걸리버 사이의 간극을 발견해낸 것이다. 필자는 이런 비평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또한 로스나 몽크의 경우와 같이 4부에서 걸리버를 일방적 혹은 궁극적 풍자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비평은 4부안에서조차도 불안정한 스위프트와 걸리버간의 거리를 짚어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5) 걸리버의 인간혐오와 이에 따른 그의 광기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졸고 「��걸리버 여행기��: 광기의 타당성」 155-177 참조.


6) ��걸리버 여행기��의 1730년판에 붙은 걸리버가 그의 사촌 심슨(Simpson)에게 보낸 1727년 4월 2일자 가상의 편지는 더욱 걸작이다. 이 편지에서 걸리버는 인간의 야후성을 혐오하는 4부에서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행기가 그의 완전한 허락 없이 출판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또한 그의 여행기가 세상을 교정하는 데 소용이 없었음을 불평하기도 한다(v-vi).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가 자신의 여행기를 출판한 것은 야후들 사이에서 살다보니 잠시 자신의 야후성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그런 “헛된 계획”(visionary Scheme)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겠다고 하는 편지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vii). 우리가 적시할 것은 그의 공언되고 재확립된 인간혐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야후의 언어로 야후인 자신의 사촌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걸리버가 얼마나 연루되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겠지만, 이 편지는 일종의 ‘헛된 계획’의 연장인 1730년판에 추가되기까지 한다. 이 모든 사실은 걸리버의 인간혐오가 완전한 진심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제스처일 개연성을 높인다 하겠다.  


7) ��통이야기�� 해석의 난해함 더 나아가 불가능함에 대해서는 졸고 「독자됨의 비극성: 미로에 빠진 스위프트의 ��통이야기�� 읽기」 165-187을 참고할 것.


8) ��통이야기��의 텍스트로 필자는 Greenberg ed., The Writings of Jonathan Swift를 사용하였다. 이후로는 본문에 면수만 표기하기로 하겠다.


9) ��걸리버 여행기��와 ��통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산문에 대한 텍스트로 필자는 Davis ed., The Prose Works of Jonathan Swift를 사용하였다.


10) 여기에다 우리는 스위프트가 후에 1730년대에 쓴 악명 높은 분변시 씨리즈를 통해 분변을 진실로 치환시켰다는 점까지 감안할 수 있다. 진실을 분변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진실의 분변과도 같은 혐오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위프트는 심리적 분변을 실제 분변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사물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과 분변을 파헤치는 것을 일치시켰고 자신과 베들럼 병원에서 인분을 뒤집어쓰고 있는 광인 사이의 구분을 지워버린다.


11) 그리고 이것은 스위프트가 1725년 9월 29일자로 포우프(Alexander Pope)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제가 제 자신에게 제안한 노고의 주된 목적은 세상을 즐겁게하기보다는 괴롭히는 것입니다. . . . 나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하는 것의 잘못을 증명하고 인간을 차라리 생각이 가능한 동물로 정의해야 한다고 하는 취지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비록 타이몬식은 아니지만) 이런 인간혐오의 큰 토대 위에 내 여행기라는 건물은 세워졌습니다”(Harold Williams 3: 103).


12) ��겸손한 제안�� 해석의 경우 과거에는 이 작품을 스위프트의 화자 비판, 즉 인간성을 상실한 무자비한 정책입안꾼들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비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는 이 글을 스위프트의 독자저주로, 즉 독자들로부터 무자비한 정책입안꾼의 제안을 반박할 권리를 박탈하고 화자를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화신처럼 만들면서 이 정책입안꾼이 제안하는 세계보다도 끔찍한 세계가 올 것을 예견하는 작품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Rawson, Lockwood, Pullen 등을 참조할 것.


13) 스위프트의 시에 대한 텍스트로 필자는 Rogers ed., Jonathan Swift: The Complete Poems를 사용하였다. 이후로는 본문 중에 행수만 표시하기로 하겠다.


14) 재프(Nora Crowe Jaffe)는 이러한 정신병원의 메타포 외에 제어할 수 없는 분노의 폭발로부터 분노의 시들, 예를 들자면 이 시나 ��숙녀에게��(To a Lady, 1733)를 보호하여 끌고 나가는 문학적 장치로 스위프트의 수사적 조절(rhetorical control)을 들고 있다. 즉 그의 분노의 본질과 상관없는 시의 희극적인 각운(rhyme)과 리듬은 분노의 표출을 나름대로 억제하고 있는 시인의 수사적 조절을 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Jaffe 153). 필자도 재프의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바, 비록 시의 내용은 파괴적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은 그냥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로 승화되는 이른바 조절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고 이런 점에서 스위프트의 분노는 분명히 지적 연출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